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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8·15의 두 죽음


한ㆍ일간에 격랑이 일때 마다 떠오른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반도에서 생긴 두 죽음이다.

한도 가즈토시. 히로히토 천황이 항복 방송을 한 8월15일 정오께에 중학3년생인 그는 담배를 꾀어 물고 피웠다. 그 당시도 물론 중학생은 절대 금연이었지만, 천황의 방송은 충격 때문에 담배를 피웠던 것이다. 그 이후 그는 계속 담배를 피웠고 문예춘추 편집국장, 전무를 지냈다. 그는 1965년 7월에 이 때의 충격을 “일본의 가장 긴 날”이란 내용의 ‘일제 패망의 날’을 책으로 냈다.

야마네 마사코. 아버지가 ‘조센진’이었고 어머니가 ‘니혼진’인 다섯 살의 딸이었다. 그녀는 천황의 피난궁전과 전쟁을 다루는 대본영이 결사항전을 치룰 ‘마츠히로 벙커’를 뚫고 있는 조선인 징용자 촌에서 살고 있었다. 8.15, 그날의 방송이 있은 날 그 어린애는 새 전쟁이 시작 된 줄 알고 어머니와 방공호에 있었다.

배가 고픈 어머니가 밖에 나가 가져온 것은 작은 오이 2개, 모녀는 이를 일본 된장 ‘미소’에 찍어 먹었다. 항복방송이 있었지만 바위 산에 벙커를 만드는 곳에 강제동원된 인부인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야마네는 1988년제 디어도어 쿡, 쿡 타야 하루코 부처가 펴낸 ‘전쟁중인 일본 구술의 역사’에서 신슈현 나가노 시에 있는 ‘마츠히로 벙커’에 깃든 ‘죽음의 긴 그림자’를 증언했다. 쿡 부처의 책은 1992년에 미국에서 나왔다.

한도의 ‘ 가장 긴 하루’에는 45년 8월15일 새벽 4시께 할복한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츠카의 죽음이 장엄하게 묘사되고 있다.

히로히토의 시종 무관이었으며 만주 제2방면군 사령관 이었던 아나미 대장은 ‘가장 긴 하루’의 주역 이었다.

연합군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제시한 포스담 선언 후(45년 7월), 일본 내각은 항복파와 결사 항전파가 팽팽히 맞섰다.

아나미는 당연히 항전파였지만 히로히토의 “신민을 구하기 위해 항복을 택하자”는 결의에 승복한다.

그는 15일 정오 방송으로 발표할 예정이었던 한 육군성 소장 장교들의 쿠테타 계획에 대해 “내 시체를 딛고 가라”며 자결을 택했다.

15일 새벽 2시께 그는 2장의 유서를 썼다. 1장의 유서에는 시조 한수가 씌어 있었다.

<대군의 깊은 은혜를 입은 이 몸 한마디 남길 말조차 없구나.>

이 유시는 그가 1932년 대소전을 앞두고 제2방면군 작전을 짜면서 전사 할 것을 각오하고 쓴 것이다.

또 한 장의 유서는 세 줄 이었다. <한 번 죽어 대죄를 사죄드립니다.>

유시는 육군대장 고레치카, 유서는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가라고 서명했다.

아나미는 새벽 3시께 할복의 결행에 앞서 유서의 다른 쪽에 7, 8자를 추가 했다. <신주불멸(神洲不滅)을 확신하며>였다.

한도는 ‘신주’는 그의 조국이며 패전 후의 일본의 가야 할 길을 표현했다고 해석했다.

“자신이 없어져도 조국은 망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이제부터 일본인은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가고 죽을 것인가? 또한 많은 장병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죽어 갔던가?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 물음에 정확하게 답할 수 있을 때 일본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나미가 자결할 때 다섯 살인 야마네는 살아남은 어른들에게서 ‘정확한 답’을 얻지 못했다.

야마네의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방송이 있은 직후 46명의 살아있던 한국 징용자가 실종, 살해당하고 화장되었다. 그것도 소문만 있었다.

누구도 한국 징용자가 왜 이곳에 끌려 왔고 왜 그들이 흔적 없이 죽었는가는 야마네에게 이야기 해준 적이 없다. 야마네는 고라구엔 야구장의 5~6배인 이 벙커를 1944년 11월11일 11시에 착공, 1945년 8월15일 75% 공정 속에 죽은 한국인 징용자의 죽음에 대한 긴 추적에 나섰다.

야마네는 유일한 생존자였던 한 노인을 만나 “왜 고국에 돌아가지 않는가” 물었다. 노인은 “나는 한 마을의 수많은 사람과 함께 이곳에 왔다. 나만 어찌 살아 고향에 갈수 있겠는가.”

산을 뚫어 10km의 터널을 만드는 이 공사의 모든 기록은 8ㆍ15 그날 태워졌다.

이를 감독했던 한 일본인 상사는 일기를 적었다. 하루 5~6명의 한국인 인부가 죽었다. 9개월 동안 7천명에서 1만명의 한국인이 일했고 그 중 1천명에서 1천5백명이 죽었다고 추정했다.

이들은 당밀 한 그룻에 12시간을 곡갱이로 바위를 깼다. 본래 월급은 2백50엔이었지만 5엔 만이 인부에게 주어졌다. 한국 징용인부들은 이 돈도 너무 많아 이들이 돈이 떨어지면 살해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츠히로 벙커는 한국 징용자에게는 일본의 ‘아우츠비츠 수용소’였다. 야마네의 가족은 1960년 그녀만을 남겨 놓고 북한으로 갔다. 어머니에게서 야마네에게 오는 편지는 “무엇 무엇을 보내라”는 것 뿐이다. “어떻게 사는지”는 편지에 없었다.

야마네 마사코는 묻고 있다. “8ㆍ15 그날 사라진 46명의 한국인 징용자에 대한 진상을 밝혀라. 마사히로 벙커를 공개 않는다고 해서 히토히로의 소화시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진상을 밝히지 않는 한 ‘죽음의 긴 그림자’는 역사에 남을 것이다.”

제발 일본의 총리이하 내각, 특히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역사교수들은 한도 가즈토씨의 책과 야마네 마사코의 증언을 다시 읽어 보길 바란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 2005-03-2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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