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한·일관계사 새로보기] 한국인ㆍ일본인(2)
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2000년 10월 27일 일본 언론은 미야기(宮城)현 쓰키다테초(築館町)의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 발굴 현장에서 70만년 전 전기 구석기 시대의 석기가 발굴됐다는 소식을 대서 특필했다. 발굴의 주인공은 당시 도호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의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부소장이었다.

고교 졸업 후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한 그는 1981년 미야기현 자자라기(座散亂木) 유적에서 당시로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4만 수천 년 전의 석기를 발굴하면서 이름을 얻은 이래 거의 혼자서 일본 구석기의 연대를 위로 위로 끌어 올렸다. 일본에 12만 년 전 이전의 전기 구석기 시대가 있느냐는 오랜 논쟁을 잠재운 것도 그였다. 그는 일본 석기 연대를 20만년 전, 30만년 전, 40만년 전, 50만년 전으로 잇따라 끌어 올렸고, 마침내 한반도나 중국 대륙과 같은 70만 년 전으로 끌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일본 언론의 열광을 불렀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열흘 쯤 지난 11월 5일 완전한 물거품이 돼 버렸다. 마이니치(每日) 신문의 끈질긴 추적으로 70만년 전의 석기는 물론 앞서 발굴된 전기 구석기 시대 석기 유물이 모두 날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에 전기 구석기 시대가 있었다는 기술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편찬한 역사 교과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었기 때문에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했다.

이 구석기 날조 사건은 정규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재야 고고학자의 과잉 집착과 의욕, 공명심에 사로잡힌 것이 직접적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문명 이후의 역사에서는 물론, 선사 유물의 출토에서도 중국이나 한국에 크게 뒤지는 현실에서 느끼는 자존심의 손상을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는 일본 학계, 나아가 일본 국민 전체의 욕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구석기 문화의 주인공들이 현재의 주민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기기보다는 무조건 오래 된 유물이 현재의 국토 영역 안에 존재했다면 국민적 자부심이 커질 수 있으리라는 엉뚱한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성향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실은 한국이나 중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되도록 유물 연대를 끌어올리려고 애쓴다. 문명과 역사의 중심축을 스스로에게서 찾으려는 주체 사관에 젖은 북한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인류는 원인(原人) 단계에서 이미 구석기 문화에 접어 들었다. 앞서 밝혔듯 중국과 한반도에서 발견된 원인 유적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 지역에 구석기 문화가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 주인공인 원인과 약 10만 년 전부터 이 지역에 나타난 현생 인류의 직접적 관계는 아직까지 드러난 것이 없다. 청동기 시대는 물론 철기 시대 이후 동북아를 무대로 활약한 수많은 집단과 한국사 - 일본사와의 관계조차 모호한 마당에 신석기 문화도 아닌, 구석기 문화 단계에서 국민적 자긍심을 찾겠다는 발상 자체가 상식과 동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어느 나라나 그런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민족 국가를 단위로 한 역사 인식 틀이 현재로서는 엄청난 흡인력을 갖고 있는 데다 그 외연이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구석기 유물 날조 사건으로 일본의 구석기 시대 편년은 다시 후기 구석기 시대로 내려갔다. 한반도나 대륙에서 전기 – 중기 - 후기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 것과 대비하면 후기 구석기 시대에 한정된 일본의 구석기 문화는 일본 열도가 한반도 및 시베리아와 육지로 이어졌던 뷔름 빙기에 대륙에서 건너간 셈이다. 이는 문화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이 빚은 당연한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한반도가 일본 열도에 오랫동안 대륙의 문물을 전해주는 가교 역할을 한 것도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지역의 문화 전통의 기원을 생각할 때의 ‘기층(基層) 문화’는 대개 신석기 시대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시기는 정착 생활과 토기 제작이 본격화하는 단계로 주거 유적이나 비교적 풍부한 유물을 통해 생활상을 추정할 수 있다. 가족 단위의 동굴 생활 수준을 넘어 여러 가족이 한 지역에 모여 소규모 집단을 이루고 사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흔히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진정한 시작이다.

더욱이 신석기 문화의 주인공은 오늘날 특정 지역 주민들의 혈연적 뿌리를 더듬을 수 있는 상한이다. 신석기 문화는 약 1만2,000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가 온난기에 접어 든 충적세(沖積世) 들어 시작됐다. 저위도 지역의 빙하가 걷히고, 고위도 지역이나 고산지대로 물러나면서 해수면은 급격히 높아졌다. 활엽수림이 북상하며 넓어졌고, 따스한 바다가 늘어뎬?

이런 자연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인류의 생활 양식도 크게 바뀌었다. 한동안 구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사냥은 계속됐지만 멧돼지 등 활엽수림에 사는 동물들이 사냥감의 주종을 이루면서 이제는 멀리로 이동해 가며 사냥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따스한 바다도 생선과 조개 등 많은 먹을 것을 제공했다. 무엇보다 활엽수림에서 나는 도토리 등의 풍부한 열매는 새로운 식량 자원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 조건이 정착 생활의 기초가 됐고, 농경과 가축 사육으로 이어졌다.

구석기 시대의 인류는 끊임 없이 사냥감을 따라 떠돌아야 했다. 어느 지역에서 그들의 화석이나 유물이 발견돼도 그 땅의 주인공으로서 현재의 주민에게 유전자를 남긴 조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제작 기법과 연대가 비슷한 구석기 유물이 서유럽과 동북아에서 함께 발견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북한은 약 2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만달 사람’을 위로 ‘덕천 사람’이나 ‘승리산 사람’, 아래로 신석기 문화의 주인공인 ‘조선 옛사람’과 직접 연결시켜 ‘조선 민족의 직계 조상’으로 삼는다. 이런 인식은 현재 남북한 주민의 형질과 ‘만달 사람’의 차이 등에서 의문이 제기되지만 굳이 형질을 따질 것도 없이 일반적 자연 조건과 그에 따른 인간 행위 예측을 통해서도 특정 구석기인을 ‘직계 조상’으로 상정하기 어렵다.

이와 달리, 신석기 시대 들어 시작된 정착 생활은 특정 지역의 당시 주민과 현재의 주민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시사한다. 그 관계는 전면적일 수도 있고, 그 이후의 지배 - 복속이나 구축, 융합에 따른 부분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든 관계를 부정하긴 어렵다. 또한 정착 생활은 문화의 독자성을 비로소 얘기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신석기 시대도 마찬가지다. 한국 문화의 독자성이나 일본 문화의 성도 약 1만년 전에 본격화한 신석기 문화에서나 말할 수 있다.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는 북아시아계 문화와 남아시아계 문화가 혼융된 형태로 나타난다. 북방 시베리아계 문화, 남방 계절풍(몬순)형 문화의 혼합이라고 해도 다를 바 없다. 상대적으로 북방계 문화가 강한 영향력을 보였고, 남방계 문화가 일부에서 나타났다. 오늘날 한반도 주민의 직접적 조상으로 여겨지는 이 시대 주인공들의 형질상의 특징이나 언어적 특성도 그렇다. 나중에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런 특성은 한결 뚜렷하지만 이미 신석기 시대에 기본적 틀이 마련됐다.

일본 열도도 같다. 일본의 신석기 시대는 흔히 ‘조몬(繩文) 시대’로 불린다. 표면에 새끼줄을 눌러 새긴 듯한 무늬를 가진 질그릇이 당시를 대표하는 유물이기 때문이다. 조몬 시대를 통 털어 북방 낙엽 활엽수림 계통과 남방 상록 활엽수림 계통의 문화가 뒤섞여 나타난다.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이는 문화 접촉에 의한 융합일 수도 있고, 혼인 및 자손 생산 관계에서의 융합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나 일본 열도에서 북방계이건, 남방계이건 전체적으로 고아시아족 일반의 형질과 문화 요소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런 요소는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활발하게 흘러 들어 온 선진 문화의 영향 하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이 시기야말로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역사의 주인공들이 본격 등장하는 때다.

황영식 한국일보 논설위원


입력시간 : 2005-03-29 14:24


황영식 한국일보 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