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 여왕에서 태극전사 어머니로

[피플] 여성 첫 태릉선수촌장 이에리사
사라예보 여왕에서 태극전사 어머니로

1973년. 김포공항에서 서울 시청 앞까지의 거리는 태극기를 든 시민들로 술렁댔다. 세계 탁구 선수권 여자 단체전에서 세계의 핑퐁 테이블을 평정하고 돌아 오는 대한의 여장군, ‘사라예보의 영웅들’을 환영하는 인파였다. 사라예보라는 생경한 지명과 이에리사라는 독특한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였다. 이 금메달 소식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레슬링)가 해방 후 한국의 첫 올림픽 금메달 소식을 알려온 것보다 3년 빠른 일로 시민들을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당시 한국인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다시 확인시켜 주며 한반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에리사(51). 그가 또 한 번 우리의 이목을 끌고 나섰다. 이번에 탁구 선수가 아니라, 태릉선수촌 촌장 자격이다. 여성이 태극 전사 요람의 수장인 태릉선수촌장에 오른 것은 1966년 개촌 40여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 1973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단짝’ 정현숙(단양군청 감독)과 우승을 일궈내며 일약 ‘사라예보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이 촌장은 이 후에도 ‘탁구와 결혼했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한국 여자 탁구의 산 증인으로 살았다. 독일에서 프로 선수로, 은퇴 후에는 용인대에서 사회체육학과 교수로, 지난해에는 아테네올림픽에서 여자 탁구팀 감독직을 맡는 등 최근까지 이어진 그의 왕성한 활동이 이를 뒷받침한다.

“아침에 선수촌장이 됐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당황스러웠습니다. 평소에 ‘내가 해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습니다만…. 어쨌든 세계 10위 권의 한국 스포츠 선수들과 지도자들이 집처럼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선수촌이 되도록 뒤에서 열심히 뒷바라지 하겠습니다.” 선수촌 분위기가 과거 권위적인 분위기에서 민주적인 리더십을 강조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고, 선수와 감독도 다 해 본 데다 특히 여성 선수들의 관리 능력을 갖춘 점 등을 고려, 김정길 대한체육회장이 그를 추천한 것이 결정적이었다는 후문.

솔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진 그의 취임 일성. “여자를 시키니까 잘 안 되더라는 얘기는 안 나오도록 잘 해 보겠습니다.” 새봄과 함께, 찾아 온 여성 특유의 섬세함에 태릉 선수촌의 기대가 잔뜩 부풀었다.

정민승 기자


입력시간 : 2005-04-07 18:11


정민승 기자 msj@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