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접으며] 불발된 '마이너리트 리포트'를 위해


이쪽에서 쓰는 말로, 결국 ‘민폐’를 끼친 것밖에 되지 않았다. “뒷 모습이라도 나가선 안 된다”라고 첫 통화에서 말해 왔을 때, 단단히 돌아 봤어야 했다.

그러나 어쨌건 그녀는 나와 주었고, 작은 공간에서 2시간이 훨씬 넘도록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은 결국 인간이 어디까지 솔직해 질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30줄에 들어 선 어느 레스비언. 그는 내면의 간절한 외침을 20대에 들어서 듣게 됐다 한다.

10대에도 이성에 대해 전혀 끌리지 않던 그녀는 대학에 들어 가 눈을 떴다. 당시 한창 문제를 끌던 성(性) 정치학 등 성 정체성에 관련된 서적과 영화가 그녀를, 말하자면 ‘의식화’ 시킨 것이다. 그녀는 그 시간을 가리켜 “내 안의 호모포비아(homophobiaㆍ동성애 공포증)를 죽이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2000년, 한국은 하나의 진실과 맞닥뜨렸다. 아동 프로 ‘뽀뽀뽀’에서 인기를 끌던 홍석천이 “나는 호모”라며 커밍 아웃 한 것. 반향은 엄청났다. 그 역시 홍커지모(홍석천의 커밍 이웃을 지지하는 모임)를 기웃대는 등 연대 의식을 키워갔다. 그 사건은 레스비언의 모임인 ‘끼리끼리’와 선이 닿은 계기이기도 했다. 한국의 레스비언이 사회적으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똑똑히 확인한 것도 그 때.

“너무나 열악했죠. 활동가도 부족했고.” 결국 그는 그 해 말 벌어졌던 레스비언 인권 운동 프로그램 ‘내 안의 자긍심 찾기’를 주도해 가는 몇몇 여성 중 하나가 됐다. 그 시점은 한국의 레스비언 운동이 친목 단체에서 사회 운동(인권) 단체로 거듭나던 때로 기록된다.

“레스비언임을 인정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자신이 변태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므로 더 더욱 힘들다”는 그의 말에는 레스비언 애인과 2년 동안 동거에 버금가는 생활을 했던 자의 세월이 절절히 스며 있었다. 그게 사랑인지, 일탈인지, 변태인지,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나? 21세기 한국, 온갖 남근주의(男根主義)적 성적 일탈이 횡행하는 이 곳 자체가 오히려 몬도가네 아닐까.

내 편 네 편 가려 당동벌이(黨同伐異)하는 습벽이 유독 강한 한국땅에서 레스비언들의 삶은 더욱 힘들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수자 중의 소수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국내의 동성애자 비율이 5~10%는 될 것”이라며 “무엇이 사랑인지 우리는 모른다”고 강한 여운을 남겼다.

장시간의 귀중한 대담을 이런 식으로 뭉뚱그려야 하는 기자의 마음, 편치 않다. 몇 시간 뒤, 전화로 게재 거부 의사를 고수하는 데는 도리 없었다. 한 가지 상식. 아우팅(outing)이란 타인에 의해 (동성애자임이) 드러나는 것을, 커밍 아웃(coming out)은 스스로 밝히는 것을 가리킨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5-04-07 18:13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