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한국인ㆍ일본인(4)
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는 BC 10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청동기 문화의 계통에 대해서는 중국 은(殷)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와 시베리아 청동기 문화의 영향이 크다는 견해로 갈려 있지만 후자 쪽이 우세하다. 시베리아의 청동기 문화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BC 13세기 무렵 시베리아 남부 지역에서 발달한 카라스크 문화다. 몽골계 사람들이 주인공인 것으로 보이는 카라스크 청동기 문화는 내몽골 오르도스 지역의 청동기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중국 은 문화와 영향을 주고 받으며 동쪽으로 옮겨 온 것으로 여겨진다.

카라스크 문화는 BC 6세기 무렵 중국 동북지역의 랴오닝(遼寧) 지방에서 비파형 동검을 특징으로 하는 청동기 문화를 발달시켰다. 비파형 동검은 랴오닝 지방에서는 물론 한반도에서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고르게 출토됐다.

비파형 동검은 BC 4세기 말~BC 3세기 초 흔히 ‘한국식 동검’으로 불리는 세형동검(좁은 놋단검)으로 발전했다. 비파형 동검에 비해 살상력이 더욱 큰 세형동검은 주로 청천강 이남 지역에서 나왔고, 연해주와 일본 규슈 지역에서도 발견됐다. 영암과 용인 등지에서 세형동검을 만들기 위한 거푸집까지 발굴돼 한반도에서 세형동검이 활발하게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당시 한반도에서 본격적인 전쟁이 거듭됐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반도 중부와 남부지역에서 세형동검이 출현한 시기는 일본 열도에서 야요이 문화가 시작된 때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 시기는 또한 오늘날 중국 허베이(河北) 지방을 중심으로 한 연(燕)나라가 북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고조선을 압박한 때이기도 했다. 바로 그런 정치ㆍ군사적 압력이 랴오둥 반도를 거쳐 한반도 북부로 밀려든 결과가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남진이었다. 이때 선진 철기 문화와 접촉한 비파형 동검 문화가 청동검의 무기로서의 성능을 개량한 결과가 세형동검 문화이다. 세형동검 문화가 야금술의 발달과 함께 이내 철기 문화로 이행해 갔다.

비파형 동검을 나중에 세형동검으로 발전시킨 집단이 선진 철기문화에 떠밀린 결과 세형동검이 한반도 남부, 일본 규슈지방에서 발견되는 이유인 셈이다. 중국 대륙 북쪽 랴오허(遼河) 주변 지역의 정치적 판도 변화가 한반도의 세력 판도에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이 다시 일본 열도로 밀려가는 동북아 고대사의 일관된 흐름이 이때 이미 정형화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연해주 지역의 세형동검 문화이다. 연해주 지역은 크게 보아 카라스크 청동기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한반도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만주 랴오닝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한 비파형 동검 문화를 건너뛰어 세형동검 문화로 바로 옮겨간 것은 세형동검 문화의 주인공들이 한반도에서 이동해 간 결과로 보아야만 설명이 가능하다. 철기 문화 세력이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밀려 들 때 백두대간 서쪽 평야지대의 세력집단은 남쪽으로 떠밀린 반면 원산평야 일대의 세력집단 일부가 북쪽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 연해주와 사할린 지역의 원주민인 길랴크족에 대한 비교언어ㆍ비교문화 연구는 적지 않은 흥미를 끈다. 나중에 자세히 밝히겠지만 한국어가 알타이어의 한 갈래라는 해묵은 통설이 최근 크게 흔들려 교과서의 관련 기술이 잇따라 빠지고 있다. 알타이어의 3대 계통인 투르크어, 몽골어, 만주-퉁구스어가 한국어에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층어는 상당히 다르다.

그런데 길랴크어가 한국어와 언어 갈래를 따지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친족어(親族語ㆍ친척 관계를 나타내는 말), 신체어(신체 각 부분의 명칭), 수사(숫자를 나타내는 말) 등에서 두드러진 친연성을 보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또한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일 때 똬리를 사용하는 등 생활풍속의 유사점도 발견됐다. 어쩌면 길랴크족과 한국 기층민이 세형동검 시대에 나누어졌음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 규슈지역으로 밀려간 세력집단에 대해서도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농경은 청동기 시대 들어 본격적인 논농사 단계로 접어들었다. 농업생산성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계급 분화와 사회 조직화가 따르는 것이 세계사의 보편적 원리다. 조직화란 정치 조직이자 군사조직의 탄생을 의미한다. 역사가 이 단계에 접어들면 평야 지대에는 대규모 경작이 이뤄지고 인구 밀집이 일어난다.

또한 얕은 구릉도 개간되거나 화전으로 일궈져 잡곡 생산에 쓰인다. 해안 지역에는 집단어로가 일어나고, 뱃길의 이점을 살린 원시적 교역에 의존하는 주민들이 정착한다. 특정 세력 집단이 어느 곳으로 이동해 가더라도 비어 있는 땅은 없었다는 얘기다. 새 세력이 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무력으로 토착 지배층을 축출하거나 하부 지배층으로 포섭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이 점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고대사 이해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비파형 동검 문화를 가진 집단이 철기 문화 집단에 밀려 남하하면서 세형동검 문화를 발전시킨 단계에서 이미 한반도 남부의 기존 세력집단은 연쇄 압력에 밀려 대한해협을 건너기 시작했다. 일본 규슈지역의 세형동검은 이런 집단 이동이 한반도 남부지역에 세형동검 문화가 정착한 후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됐음을 말해 준다.

다만 전쟁과 복속, 편입 과정에서의 집단적 축출은 일반적으로 다수 기층 민중과는 무관하다. 토착 지배층과 그 보조 세력인 군사조직, 관리조직, 기술자들이 일부 생산계층과 더불어 새로운 거점을 찾아 떠나지만 대부분의 생산계층은 그대로 남는다. 한반도에서 지배세력이 교체되는 연쇄반응이 일어났을 때 일본 규슈지역으로 건너 간 사람들도 대부분 지배층과 군사, 무기와 생활용품 제작을 맡은 장인이었을 것이다.

일본에 야요이 시대를 연 이들의 인류학적 형질은 길고 마른 얼굴, 쌍꺼풀이 없는 눈, 툭 튀어나온 광대뼈 등 북방계의 특성이 뚜렷했다. 적어도 일본 학계에서 야요이인의 북방계설은 통설이다. 반면 부산을 비롯한 남해안 동쪽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 온 사람들에게서는 한국인 치고는 남방계 특성이 비교적 강하게 나타난다. 이런 불일치는 한국과 일본에서 상정된 표준 형질이 상대적으로 다른 데서 비롯한 것이지만, 기층 민중의 상당수가 정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삶의 터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한편 야요이 시대의 주인공을 둘러싸고 한국에서는 별로 거론되지 않지만 일본에서 활발히 거론되고 있는 것이 해안과 바다, 섬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온 해민(海民)이다. 일본에서의 해민 연구는 현재도 선상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동남아 지역 일부 종족의 문화에서 일본 문화의 뿌리를 더듬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농경 생활이 지배적 생산양식이 돼 가는 가운데 해초와 조개, 가까운 바다의 고기를 잡던 채집ㆍ어로도 전문화, 나중에는 먼 바다까지 나아가 고래 등을 잡는 집단 어로로 발전해 갔다.

당시의 유적에서는 소금을 만드는 전문집단의 형성도 알 수 있다. 해민의 문화는 늦게까지 수렵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냥꾼 집단의 문화와도 일맥상통한다. 반구대 암각화에 수렵 장면과 고래잡이 장면이 함께 묘사된 것으로 보아 이런 사정은 한반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일본 학계는 한반도로부터 건너 온 북방계 사람들과 함께 일본 규슈 지역과 한반도, 중국 해안지대에까지 뚜렷한 흔적을 남긴 해민들이 야요이 문화의 형성에 상당한 기여를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이 중국 대륙과 한반도의 해안을 따라 삶의 근거를 일본 규슈지역으로 옮겨 갔을 가능성이 우선 점쳐진다. 또 직접적 이동은 아니더라도 특유의 기동력과 해양문화 특유의 소통성으로 보아 북방계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도록 도왔거나 문화 전파를 맡았을 가능성은 크다.

황영식 한국일보 논설위원


입력시간 : 2005-04-13 17:57


황영식 한국일보 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