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동이(1)
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전북 부안 내료리 돌모산 당산의 변형 솟대.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문헌이라는 <상서(尙書)> ‘우공편(禹貢篇)’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기주(冀州)의 항수(恒水)가 제대로 흐르게 되고, 대륙(大陸) 못이 범람하지 않아 거기 사는 도이(島夷)가 원래대로 가죽옷을 입게 됐다. 이 지역을 둘러 본 우(禹) 임금은 갈석산(碣石山)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황허(黃河)로 갔다.’

요(堯)ㆍ순(舜)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 성군으로 칭송되는 우(禹) 임금의 치수 공적을 칭송하면서 그 공덕이 주변의 다른 종족에까지 미쳤음을 밝힌 내용이다. <사기(史記)> ‘하(夏) 본기’는 이를 거의 그대로 인용했는데 ‘도이 ’가 ‘부이(鳧夷)로 바뀌었다. 또 같은 책의 ‘오제(五帝) 본기’에는 다시 ‘조이(鳥夷)’로 나와 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데다 ‘오리(鳧)’를 새의 대표명사로 썼으리란 점에서 ‘부이’는 ‘조이’의 다른 표기이고, ‘도이’는 ‘조이’를 잘못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조이=도이’의 정체성을 놓고 예로부터 여러 설이 분분했다. 당(唐)의 장수절(張守節)은 ‘말갈(靺鞨)이 옛날의 숙신(肅愼)이고 거기서는 돼지를 키워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조이=도이’가 말갈이라고 보았다. 원(元)의 김려상(金麗祥)은 ‘조이=도이’를 랴오둥(遼東) 지역과 한반도에 살던 종족으로 보았고, 청(淸)의 호위(胡衛)는 아예 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 사람들로 보았다.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이나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도 ‘조이=도이’를 한반도 사람으로 보았다.

현대 들어 북한의 이지린은 오늘날 한민족의 원류로 여겨지는 예맥(濊貊)족이 정착하기에 앞서 랴오둥(遼東) 지역과 한반도에 살았던 종족의 범칭이 조이라고 보았다. 즉 고조선 형성 이전의 원주민이 조이였고, 북방계 예맥족이 BC 2,000년 무렵 남하해 조이와 융합했다는 것이다.

조이와 한민족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로 거론되는 ‘동이(東夷)’와는 어떤 관계일까. 그것은 동이를 남만(南蠻) 서융(西戎) 북적(北狄)과 병렬되는 ‘동쪽 오랑캐’의 일반명사로 보느냐, 특정 종족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주자(朱子)의 친구인 여조겸(呂祖謙)의 <동래집(東萊集)>은 ‘견이( ?夷) 우이(?夷=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남이(監夷= 풍이, 風夷) 양이(暘夷=陽夷)’등 구이(九夷)를 들었다. <후한서(後漢書)> 등의 기록에도 비슷한 이름이 등장하고, 회이(淮夷) 내이(萊夷) 장이(長夷) 등도 나온다. 이 ‘구이’를 중국 상고대 정치권력을 나눠 가진 각지의 유력자, 즉 봉건제 성립 이후의 제후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종족 또는 세력집단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란 이름을 가진 다양한 종족들이 하(夏)ㆍ은(殷=商)대를 통해, 일부는 주(周) 말까지 이른바 ‘중원( 中原)’의 동서 지역에 산재해 있었다. 중원은 황허(黃河) 중하류 지역, 즉 현재의 허난(河南)성을 중심으로 산둥(山東)성 서부, 샨시(陝西)성 동부를 포함하는 중국 역사의 중심무대를 가리킨다. 구이 각각이 세력집단의 고유명사임은 <후한서> ‘동이열전’에 ‘성탕(成湯)이 즉위 후 견이를 정벌했다’는 등의 풍부한 기술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중원을 중심으로 구이를 자연스럽게 서이와 동이로 나눌 수 있다. 이 때의 ‘동이’는 중원 동쪽의 ‘이’를 가리킨다.

한편 중국의 가장 오래된 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는 ‘동이’의 ‘이’가 원래 큰 ‘대(大)’와 활 ‘궁(弓)’을 합친 글자로 그것만으로 ‘동쪽 사람들’(東方人)의 뜻이라고 밝혔다. 또한 공자가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君子不死之國)인 구이의 땅에 가고 싶다”고도 적었다. 이 때의 동이는 구이와 전체와 동의어가 된다.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로 유명한 촨시녠(傳斯年, 1896~1950년)은 ‘동이’를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는 오늘날의 산둥ㆍ장시(江蘇)ㆍ안후이(安徽) 등지에 살았던 우이 회이 래이 등을 좁은 의미의 동이로 보았다. 이들은 태호복희(太昊伏羲)씨와 소호금천(少昊金天)씨를 조상신으로 삼았으며, 태호복희씨가 팔괘(八卦)를 만들고 그것이 한자의 기본이 되는 등 중국 문명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고 지적했다. 또 중국 상고사를 서쪽의 하ㆍ 주와 동쪽의 이ㆍ 은의 대결로 파악했다. 이 좁은 의미의 동이는 춘추시대(BC 8~7세기)까지 큰 세력을 이루었으나 진(秦)의 통일로 편입된 후 독자적 세력으로서는 소멸했다. 반면 넓은 의미의 동이는 발해만과 황해 연안, 랴오허(遼河) 일대와 한반도 북부 등에 분포했던 주민집단으로 보았다.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동이는 더욱 넓은 뜻으로 쓰여 중국 동쪽의 주민집단을 모두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됐다. <삼국지(三國志)> 이후 동이는 랴오둥과 만주 한반도와 일본 열도 주민집단을 포괄하는 말로 쓰였다.

현재 국내 재야 사학계는 좁은 뜻의 동이와 넓은 뜻의 동이를 구별은 물론, 동이란 말의 시대 흐름에 따른 의미 변화를 무시한다. 중국 고문헌에 나오는 모든 ‘이’와 동이를 현재의 한민족과 직결시켜 중국 상고사를 신화시대에서 하ㆍ은ㆍ주에 이르기까지 한족과 한민족의 투쟁사로 파악한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연구는 좁은 의미의 동이족 지역과 랴오둥, 한반도 지역의 문화가 뚜렷한 성격 차이를 드러낸다는 데 집중되고 있다.

특히 사회경제적 분화와 이에 따른 정치적 결집이 시작된 시기의 청동기 문화가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동이= 한민족’ 시각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동이가 예맥족 남하 이전 랴오둥과 한반도의 원주민이라는 북한 이지린의 주장도 크게 보아 비슷한 한계를 안고 있다. 다만 그가 중국과 만주의 난생설화를 ‘조이’의 신화로 파악해 공통성을 더듬은 것은 흥미롭다.

<사기>에 따르면 은=상의 시조 성탕은 제곡(帝?)의 아들 계(契)의 후손인데, 계는 어머니가 제비 알 떨어진 것을 주워 먹고 잉태하여 낳았다. 이는 은을 세운 종족이 제비 토템을 가졌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은의 수도는 현재의 허난(河南) 지역에 있었으나 그 일족이 대대로 황해에 가까운 산둥 지역에 살았다. 이 지역에서 나중에 역시 제비를 뜻하는 연(燕)이라는 강국이 일어난 것도 단순한 우연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사기>는 주의 중심 종족도 조류 토템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주 왕실의 조상인 변(弁)은 생후 곧바로 얼음으로 덮인 개천에 버려졌는데 새들이 날아 와 날개로 덮어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주 왕실의 선조는 오랫동안 오늘날 샨시(陝西) 시안(西安) 지역에 봉토를 갖고 있었고, 초기 수도도 여기에 있었다.

이는 동이족의 일부를 가리키거나 다른 명칭일 조이라는 이름에서 분명하게 추정되는 조류 토템과의 관계로 보아 은ㆍ주의 왕족과 동이족 사이에 상당한 종교적 교감이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다.

은의 청동기에 수없이 새겨져 있는데도 분명한 의미가 파악되지 않은 채 오랫동안 단순히 어두에 붙인 발어사(發語詞)로 여겨져 왔던 ‘추(?)’자가 은의 숭조(崇鳥) 신앙과 관련된 상징이라는 가설도 국내에서 나와 있다. 추(?)는 문헌 등에서 ‘유(維)’등과도 뜻과 소리가 통하는데 모두 새와 관련된 글자라는 점에서 조류토템에서 비롯한 동이족의 족휘문(族徽文)이 상형문자로 정착된 것으로 본다.

이런 일련의 가설은 우리 전통문화에 남은 숭조신앙 흔적과 관련해 적잖은 눈길을 끈다. 또한 일본에도 비슷한 흔적이 남아 있고, 일본이 넓은 의미의 동이로서 간주됐다는 점에서 ‘동이’는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한국과 일본의 첫 접점이기도 하다.

황영식 한국일보 논설위원


입력시간 : 2005-04-27 15:49


황영식 한국일보 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