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동이(2)
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평남 중원군 진파리 1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가운데 삼족오가 선명히 투조돼 있다.

한국 전통문화에 남은 숭조(崇鳥) 또는 조령(鳥靈) 신앙의 흔적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솟대다. 긴 장대 위에 새가 앉은 모양의 솟대는 아득한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문화유산이다. 삼한(三韓)에서 신을 모시던 성스러운 장소인 ‘소도’(蘇塗)에 세운 기둥인 ‘솟을나무’(立木)를 ‘솟대’라고 했고, 그것이 그대로 신라에 이어졌다고 한다. ‘소도’ 자체가 ‘솟대’로 음운변화를 겪었을 가능성도 있다.

솟대의 기원은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한반도뿐만 아니라 몽골 시베리아 만주 일본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분포한다. 북아시아 샤머니즘(무속신앙) 문화와 관계가 있고, 특히 ‘조이(鳥夷)= 부이(鳧姨)’로도 표기된 동이족과 직접적 관계를 가진 것으로 추정하는 데 별 이견이 없다.

새만금 간척사업에 반대하는 환경운동가들이 부안 갯벌에 무더기로 세웠듯 한국의 솟대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외형뿐만 아니라 솟대를 만들어 세우는 마음가짐까지도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솟대의 장대는 대개 나무지만 돌기둥으로 된 것, 봉수대처럼 돌을 쌓아 올리거나 짚단을 새끼줄로 감아서 만든 것도 있다. 나무 장대는 곧은 장대보다 비틀린 나무를 많이 사용하고, 아예 새끼줄을 비스듬히 감은 것도 있다. 천신 또는 태양신 숭배에서 비롯한 새 숭배가 농경문화와 접목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짚이나 새끼줄이 모두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연기물(緣起物)이다. 또 비스듬히 감긴 새끼줄이나 비틀려 올라간 듯한 장대는 용틀임을 연상시킨다. 비와 바람을 부르는 용의 조화를 상정해 가뭄과 홍수, 태풍을 피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알맞은 비와 조용한 바람, 즉 우순풍조(雨順風調)를 비는 마음은 솟대 꼭대기에 얹힌 새 조각이 대부분 오리나 기러기를 형상한 듯한 데서도 읽을 수 있다. 오리와 물, 기러기와 계절풍의 관계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솟대와 농경 제의의 이런 접목은 시기적으로 나중에 이뤄졌다. 솟대의 원래적 기능은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접점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신의 뜻을 포착하고, 거꾸로 인간의 희구를 신에게 전하는 일종의 안테나다. 다만 이 안테나는 완벽한 무선 안테나가 아니어서 신탁(神託)은 신의 사자인 새가 안테나에 앉을 때 비로소 포착된다. 또한 인간의 기도도 솟대 위에 앉은 새가 우선 받은 후 하늘 높이 신에게 날아 올라가 전한다. 솟대 위의 새 조각은 신과 인간의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신령한 존재이다.

새는 천신 숭배 사상이 담긴 모든 신앙체계에서 거의 예외 없이 이런 역할을 맡는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헤르메스나 페가수스가 날개를 달고 있었던 것은 물론, 기독교의 천사도 날개를 단 것으로 상정된다. 북아시아의 천신숭배 사상과 무속신앙에서는 그 중요성이 더욱 크다. 한 무속신앙 연구자는 현재 한국의 무당들이 받고 있는 신탁의 80% 이상이 새의 영혼, 즉 조령에 의한 것이라는 재미있는 통계를 밝히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새가 걸어 나와 점괘를 써넣은 쪽지를 골라 주는 ‘새점’에도 나름대로 뿌리가 있는 셈이다.

앞서 중국 상고대 은(殷)ㆍ주(周)의 중심세력이 조류토템을 이어왔을 가능성, ‘조이=부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당시의 동이족 일반이 조령 신앙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을 함께 언급했다. 중원의 동쪽 지역에 살면서 중국의 문화 원류 형성에 크게 기여한 당시의 동이와 나중에 중국 동북쪽의 이민족 집단을 통틀어 가리킨 동이를 한 덩어리로 묶어 생각하기 어려움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전자는 중국 역사에 편입돼 묻혀 갔고, 후자는 그 이후에도 독자적 역사를 이어갔다. 부분적으로 겹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중복이 문화적 차원을 넘어 혈연적 친연성으慣沮?이어보기는 어렵다. 넓은 의미의 동이족 전체에 퍼진 숭조 탑湛?조류토템을 가진 은ㆍ주 유민들의 직접적 이동의 결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 혈연적으로도 그렇고, 고고학적 유물로 나타난 문화 토양의 차이도 크다.

북방 아시아계 고유의 천신숭배 사상과 그에 따른 숭조 풍습이 상고시대 중국 동부 지역의 조류토템과 우연히 겹치면서 이론적 틀을 갖추었거나, 기자(箕子) 동래설에서 보듯 일부 유민의 이동에 의한 문화 전파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숭조 신앙 자체도 많은 변용을 겪었을 것이다. 세발 까마귀, 즉 삼족오(三足烏)가 대표적인 예이다. 솟대의 새 조각에 오리 다음으로 많은 것이 까마귀다. 현재 한국에서 까마귀는 생명보다는 죽음과 더 밀접한 흉조(兇鳥)로 여겨지고 있지만 옛날에는 새 가운데서도 신령스러움으로는 으뜸으로 꼽히던 새였다.

각저총, 쌍영총, 강서대표, 덕흥리 고분 등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는 삼족오의 모습이 뚜렷이 남아 있다. 진파리 1호 고분에서 나온 금관 장식의 한 복판에도 삼족오가 뚜렷하다. 북방 계통인 고구려의 삼족오 신앙은 북아시아계 공통의 숭조 신앙이 세분화ㆍ정교화 과정을 거친 결과일 것으로 보인다.

삼족오는 BC 2세기 무렵에 축조된 허난(湖南)성 창시(長沙) 마왕퇴 1호 고분의 비단 그림에 일찌감치 등장한다. 이 그림은 중국 신화에 끊임없이 등장한 삼족오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담았다. ‘태양 속에 세발 달린 까마귀가 있다’는 기록이 ‘초사’(楚辭)나 ‘산해경’(山海經)에도 나와 있다.

불탄 듯 검은 까마귀의 모습에서 천신=태양신과 함께 머문 까마귀의 신성(神聖)함을 연상해 낸 결과로서 북아시아 보편의 숭조 사상과 통한다. 문제는 왜 세발인가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보통 까마귀와는 다른 특별한 까마귀를 상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음양사상에서 짝수는 음(陰)의 수이고, 따라서 불길한 숫자였다.

신령스러운 존재를 그런 불길한 수와 연관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양(陽)의 숫자인 3이 필요했다. 따라서 고구려 벽화의 삼족오는 음양사상이 들어온 이후에 정착된 관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북방계 공통의 숭조신앙 흔적이 남은 시베리아나 몽골 지역에서 삼족오 관련 유물이 나오지 않고 있는 점에서도 그렇다.

일본에 이어져 내려오는 삼족오 신앙도 마찬가지다. 일본축구협회(JFA)의 엠블렘은 삼족오가 한 발로 축구공을 움켜쥐고 있는 그림이다. 민간 기업의 로고나 신사의 사문(社紋)에서도 삼족오를 흔히 볼 수 있다. 일본이 삼족오를 내세우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이고,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동원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뒷받침하기 위한 상징이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엉뚱한 지레짐작일 뿐이다.

8세기 초에 편찬된 ‘니혼쇼키’(日本書紀)와 ‘고지키’(古事記)에는 이미 삼족오를 가리킨 것으로 보이는 ‘야타가라스’(八咫烏)라는 신령스러운 새가 나온다. ‘야타’는 길이의 단위로 대단히 커다란 것, ‘가라스’는 까마귀를 가리킨다. 장자(莊子)가 언급한 대붕(大鵬)처럼 큰 날개를 가진,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까마귀다. 또한 먼 옛날부터 이어진 신사의 설화에 삼족오가 자주 등장하며, 지금도 삼족오를 섬기는 신사도 많다. 고구려의 강한 영향을 받은 고분 벽화에도 삼족오는 선명하게 남아 있다.

[사진설명] 1. 2. 일본 시가현 미호박물관이 소장한 중국 원나라 자수 작품에 담긴 삼족오.

황영식 한국일보 논설위원


입력시간 : 2005-05-04 14:46


황영식 한국일보 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