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컴과 현대사회] 명예 철학박사 학위수여식


저녁에 방송되는 시사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아침에 잠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긴 삼성 구조본인데요.” 굵직하고 사무적인 남자의 목소리였다. “삼성 구조본?” 삼성에 ‘구조조정본부’라는 막강하고 무서운 조직이 있다는 것을 듣긴 했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 나에게 전화할 이유가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저에게 무슨 일입니까?”라고 물었다. 대답은 전혀 의외였다. “담당하는 프로그램에서 오늘 저희와 관련된 문제를 다룰 계획이더군요.” 잠이 서서히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날 저녁에 삼성과 관련된 이슈를 다루기로 예정돼 있긴 했다. 아마 에버랜드와 관련한 불법ㆍ변칙 상속 문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프로그램 안내에 올려져 있더군요.” 청취자 서비스 차원에서 미리 정해진 아이템은 프로그램 홈페이지 안내코너에 올려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내문은 전날 저녁 늦게 퇴근하기 직전에 올린 것인데, 어느새 그것을 보고 이렇게 새벽같이 전화를 한단 말인가.

텔레비전의 유명한 고발 프로그램도 아닌 라디오 프로그램의 홈페이지에 불과한 데 말이다. 더구나 휴대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놀라웠다. “그 문제와 관련해서 점심이라도 함께 하면서 얘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본론은 이것이었다. “일단 방송을 들어보고 난 뒤에 문제가 있으면 이의제기를 하는 것이 옳다”며 정중히 거절했지만 방송하는 내내 마음이 영 개운치 않았다. 그 뒤로 구조본 관계자의 연락은 없었다.

그런데 며칠 뒤 전달된 프로그램 광고의뢰서를 받아 든 순간 뭔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던 삼성그룹과 관련된 일체의 광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말로만 듣던 ‘광고보복’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는 사람을 통해 삼성측에 사실 관계를 확인했다.

돌아온 대답은 “광고 전략의 수정에 의해 광고대상 프로그램이 바뀐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있을 리가 없다”였다. 오비이락이란 얘기다. 과연 마침 그때 삼성의 광고전략이 바뀌었는지, 그리고 정말 다른 의도는 없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 뒤로도 삼성광고는 한동안 들어오지 않았다.

잊고 있던 이 기억을 새삼 되살리게 된 계기는 지난 2일 고려대학교에서 벌어진 이건희 회장의 명예철학박사 학위수여식 사건이다. 정작 이건희 회장 스스로는 “젊은 사람들의 열정으로 이해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성의 상징 교수들은 사퇴서를 내고, 정치권과 장관, 심지어 청와대 수석마저도 학생들을 비난하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그 가운데서도 상당수 언론들이 쏟아낸 기사는, 삼성이라는 자본 앞에서 언론이 어떻게 납작 엎드리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 수 없었다.

사석에서 대한민국이 ‘삼성공화국’이 돼 간다는 얘기들을 자주 듣는다. 국가예산을 뛰어넘는 135조의 매출을 기록하고, 고위급 검사들과 이름난 뉴스앵커를 스카웃하고, 회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집에서 살고 있는 삼성. 게다가 정치권력은 유한하나 재벌권력은 무한하다는 오래된 정설까지 더한다면 그냥 흘려 듣고 넘길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언론인 김중배 선생이 동아일보 편집국장 자리를 사임하면서 “언론은 이제 권력과의 싸움에서 보다 원천적인 제약 세력인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선언한 것이 1991년이다. 그 이후로 14년이 흘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본의 위력은 더 강해지고 있고, 자본과의 싸움도 더 힘겨워지고 있다. 더구나 이제는 그 싸움의 주체가 남아있는지 조차 의문이 든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일까.


김종욱 CBS PD


입력시간 : 2005-05-18 18:58


김종욱 CBS PD networking62@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