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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동이 (3)
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일본의 가스스텐구.



신화 속의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아닌 현실의 까마귀도 일본에서는 제법 대접을 받고 산다. 일본에는 까마귀가 참 많다.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 어느 곳에서나 쉽게 까마귀를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언제부턴지 까마귀를 흉조로 여겨 왔지만 일본에서는 불길한 새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다. 다만 지나치게 개체수가 늘어나 도시 행정의 골칫거리로 등장하면서 점차 귀찮고 성가신 새로 여겨지고 있을 뿐이다.

일본 도회지에서 급격하게 늘어난 까마귀는 대부분 큰부리까마귀다. 이름처럼 부리가 큼지막하고 몸길이가 최대 60㎝에 이르는 늠름한 새이다. 과거 우리 농촌의 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몸집이 작은 까마귀와 달리 큰부리까마귀는 원래 숲에서 살았다. 도시화에 따른 택지개발로 대도시 주변의 숲이 급격히 파괴되자 환경이 비슷한 도심의 공원으로 서식지를 옮겼고, 대량으로 나오는 음식쓰레기를 먹이로 삼아 환경변화에 보란 듯이 성공했다.

도쿄의 경우 메구로(目黑) 국립자연교육원 등의 깊은 숲에서 떼 지어 잠자고 아침 일찍 긴자(銀座)나 신주쿠(新宿) 등 도심으로 날아 가 음식물쓰레기를 뒤진다. 육류 찌꺼기로 포식을 하고, 남은 음식을 곳곳에 숨겨 두었다가 찾아 먹는다. 쓰레기 봉지를 마구 찢어 놓는 바람에 우선 환경미화원들의 미움을 샀다.

일반인의 미움을 산 것은 번식기의 활발한 ‘주거 침입’과 공격성이다. 봄철 번식기가 되면 암수가 짝을 이루어 무리를 떠나 살림을 차린다. 나무 위에 까치집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집을 짓는다. 나뭇가지로 얽어 만든 집에 보드라운 풀잎 등으로 보금자리를 만들어 알을 낳는다. 도시에서 마른 나뭇가지 구하기가 쉽지 않다 보니 철사 옷걸이 등의 대용품을 흔히 이용한다. 아파트 건조대 등에 걸려 있는 빈 옷걸이를 훔치려고 수시로 베란다로 날아와 주부들을 놀라게 한다.

번식기에는 영역 의식도 대단히 강해서 반경 1㎞ 정도 안으로 다른 까마귀가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새끼를 키우는 동안은 둥지로 접근하는 모든 동물을 공격한다. 가로수나 동네 공원의 나무에 둥지를 틀어놓은 까마귀가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나무 밑에서 쉬려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뒤통수를 쪼여 상처가 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더욱이 개보다 영리할 정도로 지능이 높아 둥지나 자신에게 위협적 행동을 한 사람을 기억했다가 매일 출근할 때마다 경계하고 공격하는 사례도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들을 귀찮아할 뿐 크게 미워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까마귀가 가져온 생활의 불편이 현대적 반감을 자극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잠재의식 속의 조령(鳥靈)신앙을 지울 정도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에서 자연신앙(애니미즘)이나 무속신앙(샤머니즘)이 불교와 유교, 천주교와 개신교에 의해 크게 밀려난 것과 달리 자연ㆍ 무속 신앙을 이은 신도의 강한 전통이 유지됨으로써 가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까마귀에 대한 일본인의 잠재의식은 ‘덴구’(天狗) 신앙에 비교적 강하게 남아 있다. 덴구는 우리의 도깨비를 연상시키는 일본의 요카이(妖怪)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존재다. 많은 신사의 주신(主神)으로 섬김을 받을 정도로 탄탄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스모에서 동이족의 조령신앙 흔적을 쉽사리 더듬어 볼 수 있다.

덴구는 흔히 뻘건 얼굴에 길쭉한 코를 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탈은 관광기념품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크고 긴 코가 가장 큰 특징으로 여겨지고, 묘한 성적 연상을 부르면서 날로 코가 커지고 있다. 심지어 자식을 얻으려고 덴구 신사에 기도하는 사람들까지 있어 실소를 자아낸다. 이런 코 큰 덴구, 즉 ‘하나타카텐구’(鼻高天狗)는 뿌리가 그리 깊지 않다. 애초에는 새의 부리를 형상화한 매부리코에 등에는 날개를 단 까마귀 덴구, 즉 ‘가라스텐구’(烏天狗)에 대한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澯뵀袂릿?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이기도 했고, 그 자체로도 신묘한 힘을 지닌 작은 신이기도 했다.

이 가라스텐구가 도교의 전래 이후 산속에 파묻혀 도를 닦던 수행자인 ‘야마부시’(山伏)의 이미지와 겹친 결과가 하나타카텐구이다. 흰 수염과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육환장을 짚고 있는 산신령 모습이다. 가라스텐구의 바탕인 조령신앙에 산신신앙이 결합돼 변용되는 과정을 떠올릴 수 있다.

일본 씨름인 스모(相撲)에도 조령신앙의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다. 현재 전통 씨름은 몽골과 한반도, 일본에 남아 있지만 제의적 색채는 스모가 가장 강하다. 일본의 역사 기록에 남은 가장 오래된 스모는 642년 백제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궁중 연회에서 이뤄진 것이지만 그에 앞서 농경의례로서 농촌에서 널리 행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봄에는 한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제의로서, 가을에는 하늘에 풍작을 감사하는 봉납의례로서 행해졌다.

일본 풍속화인 우키요에(浮世畵)에 남은 옛날 씨름꾼의 모습은 고대 로마 검투사나 전통적 일본 무사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강인해 보이는 근육질 몸매나 날카로운 눈매는 찾아보기 어려운 대신 불룩한 배와 부풀어 늘어진 가슴, 말끔하게 면도를 한 턱 등에서 전체적으로 둥글고 부드러운 느낌을 받게 된다. 투사의 이미지보다는 젖살이 오른 아기나 임신부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이는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스모의 제의적 원형을 더듬게 한다.

도효(土俵)라고 불리는 씨름판 자체가 제의적 장치다. 진흙을 다져 올려 제법 높은 사각형의 단을 쌓아 놓고, 그 위에 굵은 새끼줄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그 안에 모래판을 만들어 경기를 하게 한다. 흙과 볏짚으로 엮은 새끼줄 등은 한결같이 생산과 수확의 상징물이다. 씨름판 위에 매달아 늘어뜨린 작은 지붕인 쓰리야네(吊屋根)는 천황가의 조상신을 섬기는 이세진구(伊勢神宮) 본전의 지붕을 본 딴 것으로 스모 자체가 제사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씨름꾼은 정한수를 마신 후 하얀 닥종이로 입을 닦고, 제단인 도효에 올라간다. 또 경기 직전 마지막으로 몸을 푸는 단계에서 소금을 집어 뿌린다. 물과 소금은 제의에서 대표적인 정화(淨化) 수단이다. 여성이 도효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신성한 제단이 부정을 타서는 안 된다는 뿌리 깊은 잠재의식에서 비롯했다.

그런 도효 위에서 씨름꾼은 다리를 벌리고 몸을 앞으로 숙여 서로 노려보다가 손으로 땅을 짚은 후 맞붙어 싸운다. 몸을 앞으로 크게 숙이면 허리에 엉성한 발처럼 두른 사가리(下がり)가 하늘로 곧추 선다. 닭싸움에 나선 수탉이 싸움에 들어가기 직전 몸을 낮추고 목을 앞으로 길게 뺀 채 목덜미의 깃털을 꼿꼿이 세운 모습과 흡사하다.

싸움 직전의 새가 이렇게 기를 잔뜩 끌어 모은 순간은 생기(生氣)나 영(靈)이 절정을 이룬다. 모든 종교의 제사장이 그렇듯 신성한 제단에 올라 신에게 씨름 제사를 올리는 씨름꾼도 신과 인간의 매개자가 돼야 한다. 조령신앙에서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 여겨져 온 새의 모습을, 그것도 생기가 절정에 이른 모습을 형상화함으로써 씨름꾼은 그런 매개자로 화하는 것이다.

스모가 이처럼 농경의례 무대에 조령신앙이란 내용을 담아 놓은 것이라면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솟대가 조령신앙과 농경의례를 결합한 형태로 전해져 온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류토템을 널리 공유한 광의의 동이족이 찍어 놓은 발자국 위에 이후의 역사 변천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 빗물이 고였다.

그런 흔적의 공통성은 한반도와 일본에 지금도 남아 있는 민간신앙의 뿌리를 더듬어 짐작해 볼 수도 있지만 한반도와 일본의 가장 오래 된 모습을 담아 놓은 중국의 옛 역사기록을 통해서 더욱 더 분명하게 그려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에 남은 한반도 고대국가와 왜(倭)의 모습이다.


황영식 한국일보 논설위원 yshwang@hk.co.kr  


입력시간 : 2005-05-1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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