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컴과 현대사회] 뉴미디어로부터의 자유


기술의 발전이 반드시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가. 요즘 부쩍 이런 의문이 자주 제기되고 있다. 특히 방송계에서 그렇다. 기술개발과 그 기술의 실용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방송인들은 기술발전 피로감을 얘기한다.

방송통신기술은 현란하게 발전하는데 도무지 심란하단다. 그런데 이 피로감은 방송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현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술발전이 결코 유익하지 않다는 경고의 메시지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1906년 미국의 드 포리스트가 3극 진공관을 발명하면서 시작된 라디오 시대가 100주년을 앞두고 있고, 1931년에 미국에서 첫 시험방송 되면서 텔레비전 시대가 열린 지 75년이 되는 이 시점에, 방송통신기술은 무한 질주하고 있다. 그야말로 속도본능이다.

이제 DMB는 기본이고 IPTV, WiBro, BCN, DVB-H, MediaFLO, DxB 등 어지간한 전문가가 아니면 개념조차 알기 어려운 용어들이 하루가 다르게 새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 새로운 개념들이 지금 속속 현실화되고 있어 일부는 이미 우리 손안에 들려져 있거나 나머지도 머지 않아 우리의 안방이나 차량에 등장할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방송통신기술들의 결정체인 뉴미디어가 우리 삶을 더 행복하게 해 주는가. 그리고 숨가쁘게 등장하는 뉴미디어가 출시될 때마다 그것을 우리 삶의 일부로 만들어야 하는가.

삐삐라고 불리는 호출기가 세상을 평정한 때가 있었다. 돌아보면 사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의 일이다. 너도나도 이 신기한 기술의 총아를 허리춤에 달고 다녔다. 그 때 호출기 유행에 저항(?)한 사람들이 있긴 했다. 속박되는 느낌이 싫다는 이유였다. 필자도 호출기 구입을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나 직업이 사람 연락하고 연락 받는 일이라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역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의 응답을 채근하는 그 조그만 기계가 성가시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곧 호출기의 인기도 시들해져 갔다. 거의 끝물이었던가 보다. 하지만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은 없었다. 더 강한 것이 등장했다. 휴대전화가 탄생한 것이다. 역시 거의 같은 과정을 거쳐 결국은 휴대전화도 휴대할 수밖에 없었다. 편리하긴 하다. 그러나 이것이 내 삶을 얼마나 더 행복하게 해 주었는가 자문하면 그 대답은 썩 긍정적이지 않다.

그런데 이제는 휴대전화 기능에다 영상까지 보여주는 DMB가 나왔다. ‘언제 어디서나 있다’는 유비쿼터스의 총아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필자는 ‘언제 어디서나 있다’는 말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를 귀찮게 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런데 벌써 이 뉴미디어를 구입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근로자 최저임금에 해당되는 돈을 지불해야 구입할 수 있고, 매달 1만3,000원의 사용료를 내야 하는데도. 게다가 휴대전화 통화요금과 문자통화요금까지 더하면 이 매력적인 물건을 소지한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금전적 지출이 만만치 않을텐데도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새것에 대한 적응도는 역시 남다른 데가 있다. 그런데 물어보고 싶다. 그만한 돈을 지불한 만큼의 행복이 무엇일까 따져보았느냐고. 혹시 우롱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없냐고.

발전하는 기술이 사람을 더 불행하게 만든 일은 이전에도 많았다. 19세기 초 산업혁명 시기에, 급증하는 실업과 생활고의 원인을 기계 때문이라고 생각한 노동자들이 기계를 부순 러다이트 운동도 하나의 사례다. 하지만 러다이트 운동이 기술발전을 멈출 수 없었듯이, 지금 뉴미디어를 부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제안해본다. 기술발전에 사람이 놀아나는 일에 더 이상은 동참하지 말자고. 뉴미디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고. 걸어 다니면서 또는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텔레비전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 삶에 무슨 그리 큰 문제가 생기겠는가.


김종욱 CBS PD


입력시간 : 2005-06-01 17:18


김종욱 CBS PD networking62@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