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식의 "민족 배고 감정 빼고"

[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왜(倭) (2)
황영식의 "민족 배고 감정 빼고"

일본 고대국가의 출발점인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는 만화 등에 자주 등장하는 인기 캐릭터다.

한서나 후한서의 왜(倭)에 대한 기록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에 기록은 150년 정도의 공백이 있다. 이 공백의 대체적인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동이전 왜인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그 나라는 원래 남자로써 왕을 삼았다. 70~80년 전에 왜국이 혼란에 빠져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결국 함께 한 여성을 추대해 왕으로 삼았다. 이름은 히미코(卑彌呼)였다. 귀도(鬼道)에 써서 백성을 현혹했다. 이미 과년했지만 남편은 없었다. 남동생이 도와 나라를 다스렸다. 히미코가 왕이 된 이래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드물다. 노비 1,000명을 두어 시중들게 했다. 오직 남자 한사람이 있어 (히미코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고, (히미코의) 말을 전하려고 거처에 드나들었다.’

기록대로라면 규슈 지역에 있던 부족집단 사이에 오랫동안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100여개의 집단이 약 30개로 통합됐다. 오늘날 현지에서 출토되는 고고학 유물도 장기간에 걸친 전쟁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히미코가 다스린 ‘여왕국’의 이름은 야마타이(邪馬台)였으며 네 등급의 관직이 있었고, 세대수가 7만호에 이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적지 않은 규모로 당시 규슈 일대를 거의 장악한 대형 부족연맹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이 야마타이국의 위치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기나이(畿內)설보다는 규슈설로 기울고 있다. 야마타이국에 이르는 경로를 뭍길과 물길로 나누어 자세히 밝힌 것은 물론 주변 정치집단의 존재와 위치를 소개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이 무엇보다 강력한 근거가 되고 있다. 아울러 규슈 사가(滋賀)현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이 그런 역사기록을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물증으로 거론된다.

요시노가리 유적은 일본 최대의 야요이 시대 유적으로 40㏊ 정도 되는 면적을 방책과 해자로 둘러싼 대표적 환호집락이다. 환호집락 주위에도 소규모 마을 유적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어 초기 야마타이국의 도읍으로 상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일대에서 출토된 청동기 시대 후기~초기 철기시대 유물은 이 지역에 강력한 정치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요시노가리 유적에는 현재 제사를 올리던 건물, 창고, 도구 제작소 등이 복원돼 있어 1700여년 전의 삶의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요시노가리 유적에서는 한반도계 철기로 특정된 무문토기나 세형동검, 나중에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출토돼 뚜렷한 연관성을 보인 파형(巴形)동기, 철제 무기와 갑옷 등이 대량 출토됐다. 또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볼 수 있는 옹관묘가 다닥다닥 붙은 집단묘지 등도 확인됐다. 이런 연유로 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일본 고대국가의 초기형태라고 할 야마타이국이 28개 소국을 통합한 연맹체로 성립하는 과정이다. 삼국지 동이전은 그것이 전쟁과 복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랜 전쟁으로 쇠잔한 소국들이 정치적 타협책으로 히미코를 여왕으로 공동추대한 결과라고 기록했다.

히미코는 당시 규슈지역의 세력 투쟁 속에서 어떤 힘을 바탕으로 수십 개의 소국을 압도하는 지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히미코의 정체를 둘러싼 수많은 추측 가운데 ‘한반도에서 건너온 무녀’라는 시각이 비교적 널리 퍼져 있다. 이는 우선 ‘히미코’라는 이름의 뜻을 유추하는 데서 나온다.

‘히미코’라는 이름은 ‘히+미코’로 이뤄진 형태다. 일본어에서 ‘미코’는 존귀한 신분의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였던 ‘미코’(御), 즉 임금을 가리키던 말로 이해된다. ‘히’는 뜻으로는 태양(日)이나 불(火)을 가리키지만 소리로는 ‘비’(妃)나 ‘희(姬)’를 뜻한다. 따라서 가장 단순한 조합으로는 ‘여임금’을 뜻하는 ‘히미코’(姬御)를 생각할 수 있다. 한자를 이렇게 써 놓고 보면 일본에서는 ‘히메미코’라고 읽는 것이 일반적이다. ‘히메미코’가 변해 ‘히미코’가 되고, 이를 들은 중국인들이 소리를 살리고, 깔보는 기분을 섞어 ‘卑彌呼’라고 적을 수 있다.

그러나 ‘미코’는 존귀한 사람을 뜻하기 훨씬 전부터 무녀(巫女)나 신관(神官)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미코’를 표기하는 한자로 어(御)가 선택된 것 자체가 일본어에 남은 제정일치 사회의 흔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동북아의 샤머니즘은 기본적으로 천신, 또는 태양신 숭배사상에서 나왔다. 일본에서 천황이 일종의 현인신(現人神)으로 숭앙받은 것은 국가신도가 천황을 신격화하기 훨씬 이전부터의 일로서 그 뿌리가 대단히 깊다. 일본 역사에서 천황은 세속적 통치 권력의 주인공인 시절은 극히 짧았던 대신 언제나 제사장으로서의 지위는 유지해 왔다.

애초에 제사 올리는 일을 뜻했던 ‘마쓰리고토’(祭事)가 나중에 정사(政事)를 뜻하는 말로 굳어진 데서도 천황이 제사장과 같은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제사장이란 거슬러 올라가면 수석 무당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무당을 가리키는 ‘미코’라는 말이 존귀한 신분을 가리키게 된 것 자체가 제사장의 지위로서 가졌던 권위가 세속의 권력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천황을 가리키는 ‘미카도’(御門)도 어원을 따져 올라가면 ‘제사장의 거처’, ‘수석 무당의 거처’란 뜻과 다름 아니다. 함부로 이름이나 직책을 부르기 힘든 사람을 그 사람이 머무는 거처로 대신 부르는 것은 한국에도 있었던 전통이다. 사극에서 자주 듣게 되는 “이보게, 매월당(梅月堂ㆍ김시습)”같은 호칭이나, 궁궐의 동쪽에 살던 왕자를 ‘동궁’(東宮)이라고 부른 것 등이 모두 그런 예이다. 따라서 히미코는 ‘수석 여무’(女巫)란 뜻으로 쓰였을 수 있다. 나아가 당시 동북아에 보편적이었던 천신숭배 신앙체계의 무당을 가리키는 ‘태양신 무녀’(日巫)로 해석해도 별 문제가 없다.

삼국지는 히미코가 귀도를 써서 사람들을 현혹했다고 적어 종교적 힘과 권위를 시사했다. 이 귀도는 ‘사람들을 현혹하는 술법’이란 일반명사로도 쓰이지만 삼국지가 씌어진 시절 중국에서는 특정 종교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도 쓰였다. 후한 말기의 혼란기를 틈타 도교에 뿌리를 둔 오두미교나 태평도 등의 신흥종교가 일어났다.

구세신앙과 사회변혁운동이 결합해 ‘황건적의 난’ 등으로 나타나고, 이를 토벌하는 과정에 소설 삼국지의 주인공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런 혼란기가 위(魏)를 중심으로 정리되고 진(晉)으로 넘어갔다. 바로 이때의 오두미교나 태평도 등의 신흥종교를 중국 지배층은 귀도라고 부르며 업신여겼다. 히미코가 구사했다는 귀도는 바로 중국에서 문제가 됐던 귀도일 수도 있고, 중국 지배층의 눈에는 귀도와 같은 것으로 비치게 마련이었을 다른 종교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히미코가 종교지도자로서 강력한 통합력을 가졌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히미코의 출신을 굳이 한반도에 비정하는 이유는 우선 전진(前秦)의 도교 문화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전해진 문화 전파 경로 때문이다. 또 청동기 후기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갈 당시 도토리 키재기 식으로 진행된 규슈지역의 전쟁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일 수 있었던 세력집단이 한반도 남부의 앞선 철기문화를 가진 이주민 집단일 수밖에 없다는 상식적 추론의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히미코의 통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최대 적수였던 구나노쿠니(狗奴國)와 싸움을 거듭하는 가운데 히미코는 죽음을 맞았다. 새로운 왕이 들어섰으나 부족연맹체 내부의 혼란이 계속되다가 히미코의 일족인 13세 소녀 이요(壹與)가 왕위에 오르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266년 이요가 위나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일본에 관한 기록은 중국 역사서에서 오랫동안 자취를 감춘다. 중국의 정세도 혼란스러웠지만 일본 땅에도 또 한 차례의 거대한 혼란기가 찾아 들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황영식 한국일보 논설위원


입력시간 : 2005-06-02 14:59


황영식 한국일보 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