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컴과 현대사회] 방송정책 유감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침략전쟁을 시작했을 때 조사기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70% 이상이 이 전쟁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비단 이라크전쟁 뿐만이 아니다. 미국인들은 정부가 전쟁만 벌이면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치솟는다. 다른 국가의 국민들이 그 전쟁이 옳지 않다고 아무리 비난해도 미국인들은 요지부동이다. 자신의 나라를 공격하지도 위협하지도 않은 국가를 상대로 살육을 벌이는 것에 이렇게 많은 미국인들이 찬성하는 현상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곤혹스럽다.

그래서 의문을 갖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미국인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미국인들을 동시대의 합리와 이성의 세계와는 이토록 동떨어진 의식에 빠져들게 했을까. 성공회대학교 김동춘 교수는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이란 책에서 그 원인을 '언론'에서 찾았다. 요컨대 상업화되고 오락화된 미국언론에 그 책임이 있다는 얘기다. 반전시위와 부상자들의 목소리는 외면한 채 사막을 질주하는 탱크와 전투기의 폭격장면만이 가득한 TV화면이 미국인들의 비판의식을 마비시켰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민주적 가치를 담보하는 비판언론이 없으면 국가적 재앙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한가지 사례다.

이번에는 질문을 우리 내부로 던져본다. 참여정부는 한국인을 미국인처럼 비판의식이 마비된 국민으로 만들 것인가. 짧고 격렬한 시민혁명을 통해 남다른 민주의식과 비판의식, 그리고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을 그저 감각적인 오락과 스포츠에 열광하고 개인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로 만들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지금 우리는 그 기로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 분기점의 화두가 방송통신 융합과 민영 미디어렙이다. 두 가지 사안 모두 방송의 민주적 기능, 방송의 건강한 의제설정 기능을 급격히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국내 독점자본의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송통신 융합정책과 방송에 대한 자본의 직접적인 관여를 가능케 하는 민영미디어렙 정책이 지금의 추세로 진행된다면 모든 방송은 생존의 문제에 허덕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방송의 공공성과 민주적 기능은 심대하게 약화되고 시청률과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될 것이다. 그 결과는 오로지 시청자의 기호에 영합하는 자극적인 프로그램만 넘쳐나는 현상으로 귀결될 것이고, 방송은 자본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 작업의 주체는 정부다. 폭발적인 민주의식의 결과로 탄생한 참여정부가 시민들로 하여금 민주의식을 함양하고 비판의식을 기르는 것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방송정책을 세워나가는 것은 아이러니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질까. 필자는 그 이유를 참여정부의 철학부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방송정책에 관한 철학부재의 결과, 참여정부가 신자유주의정책을 방송분야에도 적용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사회전반에 대한 전일적 신자유주의화가 빈부격차를 비롯한 온갖 문제를 야기하고 있듯이 언론정책 특히 방송정책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접근은 시민의 비판의식을 약화시키고 결국 대한민국의 건강성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멀리 내다보는 안목과 철학이 없는 정부, 축적된 자본의 힘을 앞세워 자본증식에만 관심 있는 기업, 타고난 사명마저 망각하고 제 역할을 방기하고 있는 방송위원회, 주문 생산된 얼치기 이론이 횡행하는 학계…. 이런 상황에서 지금의 방송정책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소수다. 그리고 잘 들리지도 않는다. 그래도 기대할 곳은 정부 뿐이다. 늦은 감은 없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의 참담한 평가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제성장률 몇 % 높이는 것보다 국민들의 건강한 정신과 비판적 의식을 지키는 것은 훨씬 중요하다. 미디어는 돈벌이 수단 그 이상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김종욱 CBS PD


입력시간 : 2005-06-30 15:56


김종욱 CBS PD networking62@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