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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 맥아더 동상


6ㆍ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55년을 맞은 가운데, 인천에선 맥아더 동상 타도위원회 회원들이 동상철거를 주장하며 두 달 넘게 농성을 벌이고 있다. 지난 5월10일부터 동상이 세워진 송학동 자유공원에서 시작된 농성은 인천시청-중구청 앞 농성을 거쳐 7월17일(일요일)에는 동상 앞에서 시위를 할 예정이다. 동상을 지키려는 단체 등과 충돌이 예상된다.

동아일보는 6월30일자에 “맥아더 동상이 ‘제국주의 상징’이라니”라는 사설을 썼다. 동상철거를 주장하는 우리민족연방통일추진회 등 9개 재야단체가 참가한 ‘동상타도 위원회’의 “동상은 ‘제국주의 상징’이다”라는 주장을 반박 한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6ㆍ25전쟁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한국을 공산주의 적화(赤化)로부터 구한 인물이다. 제국주의가 그를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면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고 이를 지원한 구(舊)소련이야말로 제국주의의 표본이다. 유엔은 소련의 팽창주의에 맞서 참전을 결정했고 맥아더는 그 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지휘한 것이다. 6ㆍ25전쟁의 원인에 대한 논쟁은 이미 수정주의자들의 패배로 귀결된 지 오래다”고 썼다.

맥아더 동상은 6ㆍ25전쟁 중 획기적 전환을 가져온 인천상륙작전(1950년9월15일)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 공로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그려 자유공원 정상에 높이 5m 높이로 세워졌다. 오른쪽 손에 망원경을 들고 상륙이 최초로 이뤄졌던 월미도를 내려다보는 자세로 상륙 7년째인 1957년 9월15일 송학산 정상에 섰다.

1957년 7~9월에는 도쿄에 있던 유엔군 사령부가 한국으로 이동하고(7월1일), 8월에는 김정제(전 자유당간부)가 간첩으로 잡히고 정국은 조봉암, 장건상 등이 혁신세력 통합을 시도하고 있었다(8월~9월). 그때는 세계적인 냉전의 시대로 소련의 반대에 따라 한국 유엔가입안이 부결되었다(9월9일).

동상의 주인공 맥아더(1880-1964년)에 대한, 특히 한국전쟁의 총사령관으로서의 공적에 대한 찬ㆍ반은 엇갈려 있다. 그러나 그가 한반도의 서해 입구인 인천에서 떨친 상륙작전 성공에 대한 ‘역사성’과 ‘장소성’에 대한 평가는 높다.

특히 현재 일본 토요가쿠엔 대학 인문학 교수로 있는 주지안롱(朱建榮ㆍ48)의 ‘모택동의 한국전쟁’(‘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 했을까’로 6월20일 번역되어 나옴)에는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그리고 전쟁에 개입하게 되는 마오쩌둥의 모습이 생생하다.

주 교수는 전쟁발발 54주년인 2004년 6월25일 1991년 나온 이 책을 새로 쓰며 마오 주석을 통한 맥아더와 스탈린, 김일성의 모습을 선명히 그렸다. 주 교수는 맥아더가 1951년 4월11일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었을 때 마오 주석의 모습을 썼다. “그 소식이 베이징에 전달되자 마오쩌둥은 ‘용심대열’(龍心大悅:황제가 대열했다)했다고 그 측근이 증언하고 있다.”

마오쩌둥은 왜 그랬을까. 그의 분석에 의하면 마오 주석은 전쟁이 일어난 지 일주일 뒤인 7월2일 주중 소련대사 로신과 대담하고 이를 모스크바에 보고케 했다. “미국이 한국 전쟁에 대규모 부대를 증파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북한의 조선 인민군이 한반도 남부의 중요한 항구를 하루빨리 점령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마오쩌둥은 서울을 지키기 위해 인천에도 강력한 수비부대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미군 해병대가 거기에 상륙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오 주석은 인천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의 획기성을 전쟁 초기부터 마음에 점찍고 있었다. 8월의 전세는 낙동강 전선에서 부산을 향한 진전이 없었다. 북으로부터의 긴 보급선, 기대했던 남침에 대한 남한 국민 무호응에 유엔군은 증강되고 있었다. 부산은 함락 될 것 같지 않았다.

1950년 8월23일 어둠이 짙어올 때. 중국군 총참모부 작전주임 레이잉푸(雷英夫)대령은 저우언라이 총리 방을 찾았다. “우리 작전실에서 되풀이해서 검토한 결과 한국은 큰 위험을 품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미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서해안의 인천이 상륙지점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그 이유를 6가지로 정리했다.”

마오 주석은 저우 총리의 전화보고를 받고 레이 대령을 직접 불렀다. 레이는 브리핑 했다. “부산 삼각주 좁은 지역에 한국군, 미군 13개 사단이 진지를 고수하며 철수도 증원도 않고 있다. 미군은 일본에 전투력 높은 1사단, 7사단을 집결해 놓고 훈련을 하고 있다.

지중해와 태평양에 배치되어 있던 미국과 영국의 많은 함선들이 대한해협에 집결 중이다. 한번도에는 원산, 남포, 인천, 군산 등 상륙에 적당한 곳들이 많다. 그 중에서 인천에 상륙하?인민군의 수송과 후퇴의 길이 막혀 인민군을 포위할 수 있게 된다.

맥아더와 그의 제8군은 적 후방 상륙작전에 익숙하며 태평양전쟁 중에 대일전에서 경험이 있다. 특히 상륙작전은 해군과 공군의 우세를 발휘할 수 있는 작전이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큰 손해는 없다.” 마오쩌둥은 동북 변방군(13군)의 준비점검을 9월말까지 끝내고 인천상륙 가능성을 스탈린, 김일성에 알리도록 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결국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가져왔고 70년대 미ㆍ중이 문호를 열 때까지 냉전은 계속됐다.

만약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이 없었다면 한국전쟁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맥아더 동상 타도위원회는 농성에 앞서 주지안롱의 ‘모택동의 한국전쟁’을 읽어보기 바란다. 시간이 없다면 이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6ㆍ25때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 모른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 2005-07-13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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