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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사 새로보기] 한민족(3)
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한민족의 기원과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대체로 기원전 10세기 무렵 예(濊)ㆍ맥(貊)ㆍ한(韓)족의 등장과 함께 큰 줄기가 형성됐다고 보면 무리가 없다. 물론 이 무렵에 예ㆍ맥ㆍ한족이 어떤 공동체 의식을 가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식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나 가능했을 것이고, 그 또한 피지배층을 아우르지 못한 반쪽의 의식이었음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신문왕 12년조의 ‘선왕 춘추는 자못 어진 덕이 있었고, 김유신을 얻어 한 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一統三韓)하였으니…’라는 기록을 근거로 이미 삼국시대에도 동류(同類) 의식이 있었다는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 기사는 삼국통일 이후 신라 지배층의 정통성 주장에 다름 아닌 내용이며, 공동체 의식을 강조해야 했던 고려 말에 씌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 신라인의 진정한 민족의식을 드러낸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신라 백제 고구려 3국이 수시로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을 거듭했고, 당나라의 힘을 빌려 ‘적’을 타도하는 데 힘을 쏟았던 것이 역사의 실상이다.

또한 한민족의 형성을 기원전 10세기 무렵에서 찾으려는 것은 그때 형성된 하나의 집단이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는 뜻이 아니다. 거꾸로 현재 우리가 가진 민족의식이란 그릇에 담긴 다양한 요소의 연원을 더듬어 올라가, 그릇 밖으로 넘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확장해 본 결과라는 뜻이다.

중국 문헌에 보이는 ‘예맥’은 그것이 각각의 종족집단이나 그 거주지역을 가리킨 것인지, ‘예’와 ‘맥’을 합쳐 부른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초기의 기록에는 예와 맥을 따로 기록했지만 나중에는 둘을 합쳐서 부르는 예가 많았다. 예와 맥을 합쳐서 ‘예맥’으로 표기한 경우에도 그것이 반드시 하나의 종족집단을 가리킨 것으로 보긴 어렵다. 예를 들어 ‘발조선’(發朝鮮)을 발과 조선으로 나눠 보면서 예맥은 꼭 하나로 묶어 봐야 할 이유가 없다. 더욱이 ‘예맥’이라 합쳐 부른 최초의 문헌인 ‘관자’(菅子) 소광편(小匡篇)에는 별도로 맥이 언급돼 있기도 하다. 기원전 7세기 무렵의 일이다.

이는 기원전 12세기 무렵의 일을 기록한 ‘일주서’(逸周書) 황회해편(王會海篇)에 나오는 ‘예인’(濊人), 직방해편(職方海篇)과 ‘주례’(周禮) 직방씨편(職方氏篇)에 각각 보이는 ‘9맥’(九貊)이란 표현을 통해 사정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예인이 주나라 주변 종족 대표의 하나로 언급된 것은 그들이 이미 상당한 수준의 집단통합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반면 ‘9맥’이 꼭 ‘9개 집단’으로 나뉘어 있던 맥족을 가리킨 것은 아니겠지만 예족과 달리 맥족은 미통합 내지 분열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추정은 맥족이 주로 북쪽의 세력으로 설명되는 점, 기원전 2세기 무렵의 일을 기록한 ‘한서’(漢書)에 나오는 ‘호맥(胡貊) 땅은 그늘 쌓인 곳에 나무 껍질이 세 치, 얼음 두께가 여섯 자다. 사람들은 고기를 즐겨 먹고 짐승의 젖을 마시며, 새와 짐승의 털로 빽빽한 옷을 입고, 추위를 잘 참는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도 보강된다. 오늘날 몽골 북부의 삼림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목과 수렵 중심의 생활을 영위하던 종족이었기 때문에 통합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기원전 7세기 이전에 예족과 맥족은 ‘예맥’으로 불릴 정도로 경계를 접했거나, 단일 연합체로서 통합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맥족의 중심세력에 한정된 것일 뿐 기원전 2세기까지도 독립된 맥족의 계통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초기에는 예는 중국 동북방에서 내몽골에 이르는 지역, 맥은 현재의 샨시(陝西)성 북쪽 지역에따로 존재했으나 기원전 7세기 이전에 동쪽으로 이동해 예는 랴오둥(遼東) 지역, 맥의 주류는 랴오시(遼西) 지역에 자리를 잡고 활발한 융합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흔히 고한민족의 고고학적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비파형 동검문화가 랴오시, 랴오둥 지역에서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과도 어느 정도 부합된다.

그 융합의 대표적인 결과가 고조선이며, 고조선의 건국으로 예와 맥의 구분은 별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됐다. 고조선의 통합력이 약해져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 등이 일어날 때 부여와 동예는 예, 고구려와 옥저는 맥이 중심세력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단계에서는 지배층이 내세우는 계보의 문제일 뿐 기층세력은 그냥 ‘예맥’이었다고 봐도 문제가 없다.

다만 지배층의 정치적 주도권을 놓고 볼 때는 상대적으로 맥족이 우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치우 신화는 한족(漢族) 세력이 탁록 벌판에서 치우가 상징하는 주변 세력과 크게 싸운 일을 다루고 있다. 치우 세력의 지리적 위치는 맥족의 근거지인 랴오서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치우 형제가 81명이란 얘기도 맥족이 형제적 지배 구조를 갖고 있었던 사실과 통한다. 맥족의 나라인 고구려의 초기 관직인 형(兄), 대형(大兄), 태대형(太大兄) 등은 맥족이 형제적 질서를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형성했던 한 흔적이다.

치우라는 말 자체가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더듬게 한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朱蒙)은 ‘활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다. 광개토대왕비문은 주몽을 ‘추모’(鄒牟)라고 썼다.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는 ‘추(鄒)는 동이족 말이며 주루(붉을 朱+ 우부 방, 婁)라고 쓰기도 한다’고 풀이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했다고 적었다. 한자어인 무신을 고구려 고유어로는 ‘주류’라고 했음을 알 수 있고, 그 한자음은 설문해자주의 ‘주루’와 발음이 거의 같다. ‘주루=추(鄒)’라면 ‘추=치우’는 결국 무력이 뛰어난 영웅, 즉 무신을 뜻하는 맥족의 말인 셈이다.

한편으로 치우 신화와 고구려는 고조선 건국 설화를 매개로 연결되기도 한다. 치우 신화에는 풍백과 우사가 등장한다. 단군 설화에 나오는 풍백, 우사와 같다. 단군 신화에는 운사가 추가됐을 뿐이다. 그런데 중국 산둥(山東)성 자상(嘉祥)현에서 발견된 우(武)씨 사당 화상석(畵像石)에도 삼부인과 풍백, 우사, 운사, 곰과 호랑이 등 단군 설화의 내용이 거의 그대로 담겨 있다. 서기 147년에 만들어진 사당이어서 이때는 이미 단군 설화가 완성된 형태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단군 설화는 백두산을 영산(靈山)으로 여기는 만주족 등 주변 종족집단의 기원 설화와 내용과 구조가 비슷하다. 중국 동북지역과 만주 일대에 널리 퍼져있던 넓은 의미의 동이족 신화의 변주(變奏)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동명성왕 설화가 단군 설화와 기본구조가 같은 것도 고구려 지배층이 단군 설화와 그를 거슬러 올라간 치우 신화를 채용해 조합한 결과일 것이다. 건국 설화가 기본적으로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고구려 지배층은 고조선 중심세력과 궤를 같이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고조선과 고구려 건국설화는 모두 무력이 우세한 외래 집단의 이동을 그리고 있다. 유이민과 토착종족의 결합, 또는 지배 집단과 피지배 집단의 타협을 반영한 것으로 유이민 지배 집단을 중심의 변화를 그렸다. 이런 점에서 두 설화가 모두 농경생활에 빨리 익숙해진 예족보다는 늦게까지 유목?수렵 생활을 영위한 맥족 중심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의 기층을 형성한 예맥족은 먼저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해 있던 한족(韓族)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고, 그 결과로서 오늘날의 한민족이 형성됐다. 이는 일본 열도에 먼저 살고 있던 조몬인과 한반도에서 건너간 야요이인들이 결합해 오늘날의 일본 민족을 이룬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반도에 먼저 들어와 있던 한족은 누구였을까.


황영식논설위원 yshwang@hk.co.kr  


입력시간 : 2005-07-29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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