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한· 일 관계사 새로보기] 가야(1)
황영식의 "민족 빼고 감정 빼고"

일본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출토된 옹관묘(독무덤).

삼한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인 삼국지가 ‘변한’(弁韓)을 대부분 ‘변진’(弁辰)이라 써서, 마한ㆍ진한과 달리 ‘한’(韓 )이란 표기를 꺼린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모종의 구별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식은 다름 아닌 혈연ㆍ종족의 차이에서 비롯했을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 밝혔듯 삼국지는 마한과 진한의 언어가 ‘같지 않다’(不同)고 적었다. 이 ‘부동’을 변진에 대해 ‘의복?거처가 진한과 같고, 언어ㆍ법속(法俗)도 서로 비슷하다(相似)’고 적은 ‘상사’와 비교하면 부분적 차이를 지적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그런데 변진의 언어와 법속이 진한과 서로 비슷하지만 ‘귀신을 제사하는 것이 다르다(有異)’는 기록은 눈길을 끌 만하다. 변진과 진한 지배층의 말과 법속이 서로 비슷했던 반면 기층 민중이 귀신을 섬기는 변진의 풍습이 진한과는 달랐다는 뜻이다. 이는 변진과 진한의 기층 민중이 적지 않은 차이를 갖고 있었음을 말하기도 한다.

오늘날 전남 해안 지역과 경남 지역을 주무대로 했던 변진에서는 나중에 가야연맹이 일어났다. 마한 지역에서 일어난 백제나 진한 지역에서 일어난 신라, 북쪽에서 일어나 급격히 세력을 팽창한 고구려 등 3국과 달리 끝내 고대국가 단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소멸해 간 가야를 두고 흔히 ‘미완(未完)의 문명’이니, ‘잃어버린 왕국’이니 한다.

고려 시대의 ‘삼국사기’(三國史記)조차 가야사를 제외하고 편찬되는 등 문헌 사료에 가야 관련 기록이 부족한 데다 가야의 전ㆍ후기 맹주국이 있었던 김해나 고령에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나 부여,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 비해 눈길을 끌 만한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경주나 부여의 유적도 대부분 7세기 이후의 것이어서 6세기 후반에 멸망한 가야에 대해서만 특별한 유적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에 앞선 시기의, 가야 제국(諸國)의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품은 같은 시기의 백제나 신라 유물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문화수준을 보여준다.

따라서 정치적 통합 수준이나 문화 수준이 가야사에 대한 차별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어쩌면 변진을 마한ㆍ진한과 구분하려던 삼국지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그 뒤를 이은 가야에 대한 ‘특별한 시각’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변진,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가야는 왜 이런 차별을 받아야 했을까. 또한 그런 일반적 인식과 달리 ‘삼국유사’는 어떻게 왕력(王曆)편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와 대등한 연표형식으로 가락국을 기록했을까.

그 실마리는 우선 가야의 명칭에서 더듬어 볼 수 있다. 홍익대 김태식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사료적 가치가 있는 고려시대 이전의 사서나 금석문에서 지명?국명으로 가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는 ‘가야’(加耶=伽耶=伽倻), ‘가라’(加羅=伽羅=迦羅=呵?=柯羅), ‘가락’(伽落=駕洛), ‘구사’(狗邪=拘邪), ‘가량’(加良), ‘하라’(賀羅) 등 10여 가지가 나온다.

이런 다양한 표기 가운데 ‘가라’(加羅)는 49번으로 가장 많이 등장한다. 삼국사기의 가량(加良), ‘양서’(梁書)의 가라(伽羅), ‘수서’(隨書)의 가라(迦羅), 삼국유사의 가라(呵羅) 등 한 번씩 등장하는 표기도 ‘가라’라는 소리를 나타내는 다양한 표기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일본 사서에 등장하는 가라(柯羅), 하라(賀羅)도 모두 소리 값은 ‘가라’여서 가라라는 명칭이 소리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이 가야(加耶)로 삼국사기에만 30번이나 나온다. 삼국사기가 주로 신라측 사료를 중심으로 했을 것이란 점에서 이는 신라에서의 공식 표기라고 볼 수 있다. 삼국지에 잠깐 등장하는 ‘구사’(狗邪=拘邪)도 ‘구야’ ‘가히야’등 ‘가야’와 비슷한 소리 값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 삼국유사는 가야(伽耶)라는 표기를 13번이나 사용한다. 이는 불교가 흥성하던 당시 인도 불교의 성지인 부다가야(Budda Gaya)를 ‘불타가야’(佛陀伽耶)로 표기하고 그 북방의 도시인 ‘가야’(Gaya)를 ‘가야성’(伽耶城)으로 표기했던 것으로 보아 불교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이 취해진 조선시대의 기록이 불교 색ㅈ?배제하기 위해 삼국유사를 인용하면서도 伽耶를 모두 伽倻로 바꾼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결국 伽倻는 조선시대 들어 통일표기로 등장했지만 역사성이 떨어지는 인위적 표기이며, 불교적 영향이 큰 伽耶도 별로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야의 제대로 된 표기로는 ‘가라’라는 소리 값 중심의 다양한 표기와 ‘가야’(加耶)가 남는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었지만 어느 것이나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게 한다.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가야’를 ‘가나’(駕那=머리에 쓰다)와 연결시켜 가야 사람들이 끝이 뾰족한 고깔(冠?ㆍ관책)을 쓰고 다닌 데서 나온 말이고, 중국인들의 변한(弁韓)ㆍ변진(弁辰) 표기도 고깔 모습을 형용한 것이었다고 보았다.

뒤에 많은 사람들이 이 견해를 따랐으나 변진 사람들이 고깔을 즐겨 쓰고 다녔다고 추정할 만한 근거가 없는 데다 설사 그렇더라도 굳이 ‘가나’(駕那)라는 어색한 말로 그 모습을 형용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이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고깔을 가리키는 ‘변’(弁)을 ‘으뜸, 맹주’를 뜻하는 드라비다어의 ‘?恣ⅰ??연관짓는 비교언어학적 견해가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진다. 한반도 남부의 고대어, 즉 가야어 중심이 고유어에 드라비다어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것은 현재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로 굳어져 가고 있다.

고대 인도를 지배한 드라비다족은 인도유럽어족에 떠밀려 인도 남부와 동북부의 변방 지역으로 흩어진 종족이다. 그 한 갈래가 인도 남부 타밀나두성과 스리랑카 북부에 집단 거주하고 있는 타밀족이다.

이들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조사는 일본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오노 스스무(大野晋)를 비롯한 학자들은 타밀족의 고대 유적을 뒤져 일본 야요이 유적이나 가야 유적에서 보이는 밀집된 옹관묘와 똑같은 묘제를 발견했으며, 각종 토기나 전통문화에서도 대단히 비슷한 요소를 찾아냈다.

특히 일본어와 같은 뿌리인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어휘를 찾아냈다. 이런 작업은 국내 비교언어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 결과 가야어를 중심으로 한 고대 한국어에서 드라비다어의 흔적을 찾으려는 노력이 이뤄졌다.

여기서 고대 한국어의 비교언어학적 연구 방법에 대해 간단히 살피자. 우리는 현재 한자로 된 옛 기록의 지명과 인명 등을 한자음으로 읽는다. 그러나 한자는 중국어의 표기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한자를 이용한 고대 한국어의 표기는 뜻이나 소리 가운데 하나를 밝혀 적은 것일 뿐이었다.

예를 들어 신라향가의 ‘선화공주주은(善花公主主隱)’은 ‘선화공주님은’이라고 읽는다. ‘착하고 아름답다’는 뜻의 ‘선화’나 ‘공주’는 외래어로 널리 쓰인 중국어를 그대로 쓴 것이지만 님(主)은 뜻, 은(隱)은 소리만을 한자로 살린 것이다. 향가의 ‘동경’(東京)이란 표기가 ‘서라벌=셔블=서울’의 뜻을 살린 것일 뿐 당시 신라인들이 지금처럼 ‘동경’이라고 읽을 가능성은 없다.

한편 일제 식민지 시절 우리 지명이 많이 바뀌었지만 고대에도 수없이 지명이 바뀌었다. 삼국사기나 고려사 등 정사(正史)의 지리지에는 지명 변경 사실이 무수히 적혀 있다. 그런데 지명의 표기 변경은 아무렇게나 되진 않는다.

넓은 들을 뜻하는 ‘한밭’이 대전(大田)으로 바뀐 것은 뜻을 살린 것이고, 예를 들어 넓은 들을 뜻하는 ‘한두리(한들의 경상도 방언)’가 나중에 ‘한야’(閑野)로 바뀌었다면 그것은 ‘한두리’와 소리가 비슷한 ‘한들’의 착각한 한자 표기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古靈郡(고령군)…今咸靈(금함령)’이란 설명이 있을 때 이를 그냥 ‘고령군은 지금의 함령’이라고 읽을 게 아니라 소리나 뜻으로 보아 고(古)= 함(咸)이 성립할 수 있는 다양한 주변 언어를 살펴야 한다.


황영식 한국일보 논설위원


입력시간 : 2005-08-23 15:05


황영식 한국일보 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