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가야 (2)


삼국사기 지리지 등에 보이는 가야 지명에서 유추되는 가야의 고유어가 드라비다어와 상당한 친연성(親緣性)을 가진다는 점은 당시 이 지역의 종족 구성과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수로왕(首露王)의 탄생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천지가 개벽한 뒤로 이 지방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고, 임금과 신하 호칭도 없었다.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구간(九干)이 있어 백성을 다스렸으니 대개 100호, 7만5,000인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거의 스스로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었다.

후한(後漢)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42년) 임인(壬寅) 3월 상사일(上巳日- 첫 번째 뱀날)에 북쪽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마을 사람 200~300명이 모였다.

사람 소리 같기는 한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렸다.… “하늘이 내게 명해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시어 여기 왔으니 너희는 이 봉우리의 흙을 파면서 노래하고 춤추라.”…그러자 곧 하늘에서 자색(紫色) 줄이 드리워져 땅에 닿았는데 줄 끝에 붉은 단이 붙은 보자기에 금합이 싸여 있었다. 열어보니 해와 같이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

12일을 지난 다음날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여 금합을 열어 보니 알 여섯이 모두 사내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했다.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이 축하의 절을 하고 공경하기를 다했다.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는데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고 혹은 수릉(首陵)이라고도 했는데 수로는 대가락(大駕洛)의 왕이 되고,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다섯 가야국의 임금이 되었다.》

이 설화는 김해 가락국(금관가야)의 건국신화이기도 한데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 속의 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은 천손강림(天孫降臨) 및 난생(卵生) 설화의 전형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

북방계 특유의 천신숭배 사상과 여기서 파생한 숭조(崇鳥)신앙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는 단군이나 동명성왕 설화 등 다른 천손강림 신화와 마찬가지로 우세한 외래 집단의 도래를 의미한다. 수로왕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그것도 다른 황금 알에서 태어난 다섯 사내 아이가 상징하듯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약간 계통이 다른 세력집단과 함께 이 지역으로 들어와 토착 집단과 결합했음을 알 수 있다.

토착 세력은 ‘우물을 파고, 밭을 갈아 먹었다’는 내용에서 나타나듯 농경 집단이었다.

원래의 지배층인 9간은 몽골어의 수장을 뜻하는 칸ㆍ한(Khan)을 표기했을 ‘간’(干)이란 명칭으로 보아 북방의 몽골계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들이 북방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선주민과 결합해 이룬 위에 다시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북방계 선진 집단이 이주해 들어온 가야 지역의 정치변화 양상과 가야 사회의 중층적 구성이 엿보인다.

단일민족, 또는 단일종족의 역사에 집착해 온 고정관념에 비추면 이런 중층적 사회 구조가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실은 정도의 차이일 뿐 가야만이 아닌 고대 사회의 일반적 특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수로왕 설화는 북방계의 천손강림 신화에 그치지 않는다. 신령스러운 바다 동물로 여겨진 거북이 등장, 남방계 해양문화의 흔적을 엿보게 한다.

이는 수로왕의 비인 허황옥(許黃玉)과 관련된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한결 인상이 강해진다. 인도 중부에 있었던 아유타(阿踰? -산스크리트어 Ayudhya)국의 공주가 바다를 건너와 수로왕과 결혼했다는 것은 가야 지배층이 북방 유목민 세력과 남방 해양세력의 결합에 의해 형성됐음을 추정하게 한다.

이런 추정은 삼국유사의 다른 기록에 의해서도 보강된다. 〈파사석탑〉(婆娑石塔)조에서 김해의 파사석탑에 대해 허황옥이 바다를 건너올 때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으며,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돌에는 조금씩 붉은 반점이 있고, 그 질은 매우 부드럽고 좋아서 이 지방 것이 아니라고 했다.

또 〈어산불영〉(魚山佛影) 조에서는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만어사(萬魚寺)는 옛 자성산(慈成山)이요, 또 아야사산(阿耶斯山)이며 그 옆에 가라국(呵?國)이 있었다’고 적었다. ‘아야사’는 ‘마야사’(摩耶斯)의 잘못이며 물고기를 뜻한다는 주도 달아 두었다. 이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대정(大定) 20년 경자(庚子), 곧 (고려) 명종(明宗) 10년(1180년)에 처음으로 만어사를 세웠다. 동량(棟梁) 보림(寶林- 고려의 승려)이 장계에 올린 글에 이 산중의 기이한 자취가 북천축(北天竺) 가라국(訶羅國)의 부처 그림자 사적과 부합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이 같은 내용의 진실성 여부를 어떻게 보든, 삼국유사 저술 당시 일연(一然)은 아유타국이 인도에 있었던 나라이고, 파사석탑이 당시 김해에 있었음을 명백한 사실로 받아 들이고 있었고, 김수로왕의 가락국과 인도 중동부의 가라국을 비교하고자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인도와 한반도 남부에서 ‘Kara’라는 같은 이름의 나라가 등장한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이종기(李鍾琦)의 ‘가락국 탐사’(일지사, 1977)는 드라비다족이 세운 아유타국은 BC 10세기부터 AD 20년까지 인도 갠지즈강 북쪽의 기름진 땅에 있었던 코살라(Kosala)의 수도에 있었고, 멸망 후 일부 유민이 식민지였던 태국 메남강변의 고도시 아유타로 옮겼을 것으로 추정했다. 아유타국은 신어(神魚)를 문장으로 삼았고, Kara는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허황옥은 인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태국에서 메남강을 통해 바다로 나온 후 중국 해안으로 동중국해를 거쳐 김해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인도는 이미 BC 2세기에 막강한 수군을 갖고 있었고, 인도차이나 반도에 진출해 연안에 많은 정착지를 두었다는 것이 해양사학의 일치된 견해다.

인도에서 갠지즈강 유역에 살았고, 태국에 흘러든 뒤에도 메남강 유역에 살았던 것으로 보아 아유타국 유민들도 충분히 한반도 남해안까지 올 수 있는 항해력을 갖추었다고 볼 만하다.

가야에 북방계 문화 요소와 함께 남방계 해양문화 요소가 작용했으리란 점은 객관적 조건과도 맞아 떨어진다. 가야는 철의 생산과 무역을 통해 번영했다.

지리적 입지나 철을 매개로 한 해상무역을 꽃피운 역사적 사실은 뛰어난 항해능력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그런 항해능력을 갖춘 해상세력의 존재가 불가결하다.

일본 청동기 시대를 일군 야요이 문화가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부터의 집단적 이주에 의해 형성됐다. 일본인의 형질에 북방계 요소가 절반 이상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한국인의 형질에 북방계 요소가 강한 가운데 남방계 요소가 상당히 남아 있고, 문화적으로도 북방계 요소와 함께 남방계 요소가 나타나는 것도 과거 어느 한때 한반도 남부 지역에 남방계 문화요소가 강하게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이를 동시에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이 고대 중국 동남 해안~ 한반도 남부~ 일본 규슈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해민(海民) 집단의 존재이다.

아유타국을 비롯해 인도의 고향에서 밀려난 드라비다족 유민들이 해안선을 따라 바다를 떠돌던 해민 집단의 한 축을 이루었다면 많은 의문이 한꺼번에 풀린다.

가야어나 일본어에 왜 드라비어의 흔적이 강하게 남았는지, ‘천황가에는 특유의 언어가 전해져 왔는데 바로 가야어’라는 이야기가 왜 지금도 전설처럼 일본에 떠돌고 있는지가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황영식 논설위원


입력시간 : 2005-08-30 15:40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