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1910년 8월29일 - 그 후 95년


매천(梅泉) 황현(潢玹)은 경술년인 1910년인8월22일 “합방조약이 체결되었다”는 필기를 마친 후 절필했다. 9월10일 매천은 8월29일에 공포된 합방이 군아(郡衙)와 민간에 알려지자 그날 밤 아편을 마시고 그 이튿날 절명했다.

“조수(鳥獸)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오. 무궁화 이 세계는 망하고 말았구려.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 세상에 글 아는 사람(識家人)되기 어렵기도 합니다.” 그는 절시 4편을 남겼다. 또 제자들에게 유서를 남겼다.

“나는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할만한 의리는 없다. 다만 이 나라가 5백년 동안 선비(識家人)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한 날 선비 한 사람도 죽지 않는다면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나는 위로는 한결같은 마음의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 읽은 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을 뿐이다. 아득히 오랜 잠에서 깨어나 참으로 통쾌함을 깨달으니 너희는 너무 슬퍼하지 말라.”

그 후 1919년 8월29일을 맞아 상하이 임시정부는 3월1일을 건국기념일, 8월29일을 국치(國恥) 기념일로 추념했다. 만주 동포들은 ‘국치추념가’(작사 검소년)를 지어 이날을 곱씹었다. “경술년 추팔월 이십구일은/ 조국의 운명이 떠난 날이니/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여라/ 갈수록 좀 설움 더욱 아프다.”

상하이에서 발행하던 ‘독립신문’ 1919년 9월9일자는 8ㆍ29의 서울 모습을 전하고 있다.

“29일에는 각 상점이 일제히 철시하되 마치 예약한 듯하고, 잡상인이라도 문을 연 자가 전무하여, 외국인도 문을 열지 않았다. 오전 10시경에 북악산에 큰 태극기를 달고 만세를 불렀다.

적은 헌병순사를 총동원해 하루 종일 자동차로 시가를 횡행했고 골목마다 헌병이 지켰다. 남대문, 종로통에 인산인해를 이루며 왕래하는 사람들은 소곤소곤 귓속말을 할 뿐이었다. 용산의 일본군은 하루 종일 포를 쏘아 한성을 위협했다.

적은 28일부터 공연히 행인 수십명을 체포하여 격문살포 혐의로 악형을 가했다. 인심의 혼란은 전시보다 더한 듯하며 적은 비상경찰 및 정탐을 경성 모든 곳에 깔아 놓았다.”(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교육과 교수의 ‘8ㆍ29 국치일, 잊혀져 온 통한의 그날이여’ 오마이뉴스 8월29일자 기고문에서)

그 뒤 18년 후 일본은 1937년 7월7일 베이징 북쪽 노구교에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8월29일은 그들의 경찰이 가장 위험스러운 첫 번째 날로 정해 단속이 심했다.

이해 8월께 합방과 함께 승지의 자리를 떠난 용인군 양지마을에 사는 이조영은 11살 난 외손자 조문기(79.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가 들고 온 일장기를 보고 격정에 쌓여 물었다.

“문기야! 그 손에 든 게 뭐야?”

손에는 역에서 중국전선으로 떠나는 군인들을 전송했던 일장기가 들려있었다.

“학교에서 나눠준 국기예요.”

“이놈! 예가 어디라고 망측한 걸 집으로 들이는 게냐!”

외할아버지 이 옹은 밤이 깊자 조문기 소년에게 이야기했다. “순종이 황제자리에 오른 후(1907년 7월) 일본군부와 이완용, 송병준 등 매국노들은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는 합방조약을 강행하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멸망하였고 이후로 총독부가 들어서고 오직 일본왕의 지시만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1945년 8ㆍ15가 있기 20일전 7월24일에 이 옹의 외손자 조문기는 19살의 나이에 부민관 ‘아세아 민족분격대회’장에 명주실로 심지를 만든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렸다. 마지막 일제에 대한 테러였다. 조문기는 국치 95년, 광복 60년이 되는 올해 3월에 ‘슬픈 조국의 노래’라는 회고록을 냈다.

그는 썼다. “외조부 승지 이조영. 그 분은 독립운동가는 아니지만 왜놈들, 역적놈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찬 분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나의 뇌리에 각인되어 평생을 지배했다.”

해방이 된 후 첫 번째 국치일에는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임정의 내무총장이었고 귀국 후 이승만의 독립촉성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신익희 (1984~1956년 국회의장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제3대 대통령 선거 유세 중 서거)가 8월27일 미 군정 CIC에 연행된 것이다.

그가 거처하던 낙산장과 독촉 사무실에서 압수된 8월27일자 친필 ‘지시문’과 ‘국민구호’에는 광복 후에 그가 느낀 ‘국치’에 대한 생각이 요약되어 있다.

-국치의 설치(雪恥 부끄러움을 씻어내고 명예를 되찾음)는 자주 독립뿐이다!

-한국의 정부는 한국인이 세워야 한다!

-우리의 총역량을 정부수립에로 결집하자!

-우리 정부가 있어야 옳은 민주가 있다!

-우리 정부가 있어야 굶지 않는다!

-우리 정부가 있어야 헐벗지 않는다!

-우리 정寬?있어야 일터가 있다!

-입법 행정권을 우리가 가져야 한다!

-남북 군정의 조속 철퇴를 위하여 협력을 다 하자!

이로부터 59년 후 이번 친일인사 1차 명단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윤경로(58.한성대 총장)는 왜 8ㆍ29 국치일에 발표가 있었는지에 대해 밝혔다.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일을 기념일로 하자는데 찬성한다.

경술국치일은 민족으로 봐서는 치욕스러운 날이다. 3ㆍ1절 못지않은 기념일이 될 수 있다. 경술국치일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8월을 보내며 19살 나이에 일제에 대한 마지막 테러를 가했던 조문기 옹의 ‘슬픈 조국의 노래’를 친일명단 발표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모두가 읽어 보길 바란다.

입력시간 : 2005-09-0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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