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배 칼럼] 김원봉과 나혜석


혁명가나 화가의 일생이 혁명적이거나 예술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광복 60주년을 맞아 발간된, 1919년 11월부터 일제에 테러로 맞서온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의 평전 ‘약산 김원봉’(소설가 이원규 씀)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자 여성해방론자인 정월(晶月) 나혜석(1896~1948)의 평전 ‘화가 나혜석’(미술평론가 윤범모 씀)을 읽으면 그걸 느끼게 된다.

특히 ‘약산 김원봉’에 나온 (김원봉과) 나혜석과의 계속된 인연은 소설적이다. 나혜석의 평전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지 않지만 그렇다.

경남 밀양 태생인 김원봉은 1913년 당시 인촌 김성수가 교주인 중앙중학 2년 편입생이었다. 그의 담임은 도쿄공업고등학교를 나온 화학담당 나경석(1890~1959)이었다.

밀양의 민족주의 학교, 동화학교의 폐교로 2년여의 방황끝에 중앙중학교로 온 김원봉은 나 교사의 “무엇이 되겠느냐”는 물음에 “안중근 선생처럼 일본과 싸우겠다”고 대답했다.

나 교사는 수원에서 ‘큰대문집’으로 알려진 호조참판 나영란을 증조로, 용인 시흥군수를 지낸 나기정을 할아버지로 둔, ‘부잣집’의 증손자였고 손자였다.

김원봉은 이듬해 여름방학을 마치고 ‘큰대문집’을 찾았다. 그는 나 교사의 누이 혜석이 집 연못가에서 이젤을 놓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때 혜석은 진명여고를 수석으로 나와 도쿄미술전문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이런 장면에서는 늘 그렇듯 나 교사는 김원봉과 토론을 벌였고 여기에 나혜석도 끼었다.

그날의 토론 주제는 허먼 멜빌의 ‘백경(모비딕)’과 서머셋 몸의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였다. 김원봉은 일본어가 짧아 일본어 번역본이 읽기 어렵다고 했다. 이때 나혜석이 끼어들었다.

“일본을 이기려면 일본말에 능통해야 하는 게 첫째 조건이지요.” “일본보다 문명이 앞선 독일어에 능통해야 합니다. 독일은 또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를 가진 나라이기도 하지요. 기회가 온다면 나는 일본 유학보다는 독일 유학을 가고 싶습니다.”

김원봉은 중학을 마치면서 텐진에 있는 독일계 학교인 덕화 학당에 가겠다고 했다. 그는 1916년 덕화 학당에 갔으나 폐교되자 1918년 중앙중학교에서 만난 김두전, 이명건과 셋이서 약산(若山), 약수(若水), 여성(如星) 이라는 ‘같다(如ㆍ若)’라는 뜻의 문자가 들어간 호를 나누고 난징의 금능대학에 입교했다.

1919년 김약산은 만주 지린에서 신흥무관학교를 나온 후 11월11일 의열단을 만들고 그 우두머리에 오른다. “천하의 정의로운 사(事)에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에 따라 모임의 이름은 의열(義烈)단, 그 우두머리는 단장이나 대장이 아닌 의백(義伯)이었다.

의백은 의리로 맺은 형제들의 맏형이란 뜻이었다. 그후 의열단원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의열단의 우두머리 약산을 ‘의백’이라 부르지 않을 때는 가짜임이 들통났다.

일제의 총독부, 또 그에게 협력한 친일배에게 폭탄 투척과 사살 등의 테러를 감행한 의열단은 ▲1920년 11월 최수열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1921년 9월 의열단원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1922년 상하이 황포탄에서 일본군 대장 다라카 사살 기도(김익상, 오성륜, 이종암) ▲1923년 1월 김상옥의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등의 쾌거를 이뤘다.

김약산의 이름과 의열단의 기개는 조선과 중국을 흔들었다. 김약산은 1923년 1월 자신을 체포하러 온 경기도 경찰부 황옥 경부를 의열단에 입단시키고 폭탄, 권총, 탄약의 국내 밀반입에 몰입한다.

이때 나혜석은 일본 단동 영사관 부영사로 있던 남편을 따라 국내 출입문인 그곳에 있었다.

1921년 1월의 어느날 파티장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의 인력거꾼이 그녀에게 쪽지를 전했다. “안녕하신지요. 지난번에 뵙고 격조했습니다.

조선 장생포에서 잡은 흰고래 고기를 구했습니다. 사람을 시켜서 한 관쯤 보낼 수 있지만, 직접 드리고 싶습니다. 김철 드림.”

나혜석은 ‘흰고래 고기(백경)’에서 9년 전 수원 ‘큰대문집’에서 본 김원봉 학생을 떠올릴 수 있었다. “고래를 어떻게 잡는지 아십니까?”

인력거꾼은 중얼거리듯 물었다. 인간들이 굴레(Human Bondage)를 씌워 잡겠지요.” 나혜석은 9년 전 토론한 서머셋 몸의 ‘인간의 굴레’로 답한 것이다.

그녀는 9년여만에 그를 만났다. “아아 의백이 직접 왔군요. 나는 놀라서 가슴이 막 두근거려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도움을 청하려고 연락을 했습니다.” “말씀하세요. 나도 조선의 딸이니 돕겠어요.”

덕분에 김약산은 ‘안동영사관’이란 꼬리표가 달린 ‘폭탄’을 국내로 부칠 수 있었다.

비록 1923년 ‘의열단 2차 사건’, ‘황옥 경부 사건’으로 불리는 이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 이면에는 소설 같은 이야기 ‘백경’과 ‘인간의 굴레’가 숨어있었다.

나혜석은 1948년 12월10일 서울의 시립 무연고자 병동에서 무덤도 남기지 않은 채 퇴락한 이혼녀, 추락한 예술가로 사라졌다. 그 10년 후 김약산은 남한에서 북한으로 가 노동상을 사임한 후 정치보위부 감옥에서 종파주의자로 몰려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 넣고 자살했다.

김약산이나 나혜석 개개의 삶은 허무나 서글픔으로 남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삶을 연결해 보면 이념과 예술보다 소설 ‘백경’과 ‘인간의 굴레’들의 주인공처럼 혁명적이고 예술적이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 2005-09-26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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