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서울탈환과 세 미군


“대통령 각하! 인류 최대의 기대와 영감(靈感)을 기조로 하여 싸워온 우리 유엔군은 자비로운 하나님의 가호아래 여기 한국의 수도 서울을 해방시켰습니다.…

본인은 유엔을 대표하여 귀하의 정부에게 원래 자리를 되찾아드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귀하의 헌법상 책무를 이곳에서 더 잘 수행하시기를 바랍니다.”

1950년 9월29일 정오의 종소리와 함께 중앙청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수도 탈환식에서 70세의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미 육군원수가 한 연설의 일부다.

국회의사당의 천정은 뻥 뚫려 있었고 멀리서 들리는 포소리에 유리조각들이 떨어졌다. 넥타이를 하지 않은 카키색 옷차림의 맥아더는 연설을 계속했다. 75세의 이승만 대통령은 눈 한번 깜빡 하지 않았다.

“내 자신의 영원한 감사와 한국민의 감사를 어떻게 말로써 다 표현할지 모르겠다”고 이 대통령은 답사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눈물이 흘렀다.

1950년 6월28일,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지 3개월만의 탈환은 계속되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한국 헌법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다. 그날의 식이 있기 전후에 발생했던 세 미국 군인의 죽음은 오늘을 사는 서울 시민은 기려야 한다.

첫 번째가 1950년 9월22일 상오 지금의 녹번동 어린이 공원 근처에서 산화한 해군 중위 윌리엄 사우다. 해병 5연대 3대대 I중대의 정보장교였다.

사우 중위는 1922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목사이자 신학교 교사였던 핏츠 제럴드 사우다.

그는 평양 외국인 학교를 나와 1943년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안 대학을 최우등생으로 졸업한 후 해군에 입대, PT정 장교가 됐다.

그는 한국어가 능통했던 탓에 미 국방부 조사관이 되었고, 1946년 8월 경남 진해에 개설된 해군사관 영어 및 작전 교관을 지냈다. 하버드대학에서 동아시아에 대한 연구를 하던 중 한국전에 참전했다.

사우 중위는 9월20일 행주산성 쪽으로 한강을 건너, 능곡, 수색에 교두보를 마련한 해병 5연대 3대대에서, 서울 서부지역 안산고지(이대 건너편, 서대문 형무소 맞은편) 점령의 선공소대의 척후병과 함께 북의 저격중대를 섬멸 중이었다.

사우 중위는 척후병이 적탄에 맞고 쓰러지자 자신의 몸을 던져 그를 덮었다. 그 후 그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속해있던 I중대는 2시간 여를 인민군과 교전했다. 사우와 척후병을 동료들이 구했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사우에게 있어서 제2의 조국이었던 한국에서 전사한 그에게 미국은 은성무공훈장을, 한국은 충무금성훈장을 추서했다. 서울탈환전의 첫 은성무공훈장 수여자였다.

두 번째로 잊지 말아야 할 병사는 해병 5연대 3대대 G중대의 유진 오브리건 일등병(LA출신, 당시 19세).

오브리건 일병은 9월26일 상오 서대문 근처에서 바리케이트를 쳐놓고 저항하던 인민군에 의해 쓰러진 전우를 구하려다 산화했다. 명예훈장 기록에 의하면 서울 탈환전의 첫 명예훈장 수여자로 되어있다.

해병 5연대 3대대 G중대는 서대문 방면에서 인민군이 쏟아내는 2정의 기관총 사격에 많은 사상자를 봤다.

오브리건 일병은 흙더미에 쓰러져 신음하는 한 병사를 보고 빗발치는 총탄 사이로 달려가 그를 소대쪽으로 끌고 왔다.

G중대는 오브리건 일병의 구출작전을 도와 적을 향해 엄호사격했다. 그렇지만 오브리건 일병이 부상병을 인계하고 일어서는 순간 적 기관총탄이 그의 몸통을 뚫었다. 그렇게 오브리건 일병은 숨을 거두었다.

명예훈장은 2명 이상의 전우나 상사의 증언이 있어야만 수여된다. 그는 사후 수훈했다. 미국 최고의 용맹성을 자랑하며, 1861년 남북전쟁 중에 제정된 명예훈장(Medal of Honor)은 한국전에서 모두 131명에게 수여됐다.

육군에서 78명, 해병 42명, 해군 7명, 공군에서 4명이 수훈했다. 이 중 100명이 전사후 추서 받았고, 31명이 생존했다.

마지막으로 서울 탈환전의 명예훈장 수훈자는 9월29일 밤 고려대학교 뒷편, 의정부로 이어지는 길이 보이는 132고지에서 산화한 해병 1연대 2대대 G중대원 스탠리 크리스티언손 일병이다.

위스콘신 중부 출신으로 1943년 18세가 되던 해에 해병대에 지원해 남태평양의 산호초 섬인 타라와 전투에 참여, 하사까지 진급했다.

그 후 귀향했지만 해병이 좋아 다시 지원했고, 6ㆍ25가 발발하던 때에 일본의 해병 1사단 이등병이었다.

인천상륙 작전에서 보인 용맹성으로 일등병이 된 그는 북으로 북으로 달아나는 인민군을 추격하기 위해 132고지에서 참호를 구축하고 기다렸다.

9월29일 자정 직전 퇴각하는 인민군은 마지막 발악처럼 크리스티언손의 중대를 기습했다.

크리스티언손은 같은 참호에 있던 동료에게 중대본부에 이를 알리도록 한 후, 적진을 향해 기관총을 드르륵 갈겼다.

인민군들의 ‘살려주시오’ 소리를 들으며 중대원들이 크리스티언손 일병이 있던 참호에 도착했으나 그는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중대에 적의 기습 사실을 알리고 적에게 혼자서 저항한 용맹성은 서울탈환 작전의 마지막 명예 훈장 수훈자가 되게 했다.

맥아더 동상 철거 운동에 나서는 이들, 6ㆍ25이후 서울로 들어온 시민들 그리고 이명박 서울시장은 1950년 9월15~29일 사이에 서울을 되찾기 위해, 한국 헌법을 지키기 위해 산화한 이 세 명의 미 군인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 2005-10-05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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