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관수교와 영도교


1927년에 태어난 독일의 소설가 마틴 발저는 과거의 기억, 특히 2차 대전 전의 독일을 다룬 소설을 많이 썼다. 그러나 그는 그 과거를 다룰 때 기억을 토해내기보다는 회상을 통할 때 더 선명하게 되돌아 볼 수 있다고 했다.

“기억이란 오래 전에 변했지만 자기 나름의 생각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회상은 현재와 과거가 서로 관여해 만들어 내는 것이며, 현재의 상황을 바탕으로 과거 일을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기억과 회상을 구분했다.

1937년에 청계천변인 서울 종로구 장사동에서 태어나서 문화일보 주필, 사장을 지낸 언론인 손광식은 지난해 8월 ‘내 고향 청계천 사람들’을 냈다. 관수교 일대 세운상가와 종로구쪽의 청계천 이웃들을 다룬 것이다.

또 1940년 생인 소설가 김용운은 청계천 복원에 맞춰 장편소설 ‘청계천 민들레’를 냈다. 서울 숭인동과 황학동, 왕십리동을 잇는 영도교(일명 영미교) 남쪽 왕십리쪽 사람들을 쓴 것이다.

손광식이나 김용운이 다룬 것은 기억일까, 회상일까. ‘6ㆍ25’, ‘한국전쟁’이 났을 때 중학 2년생, 초등학교 5년생으로 이 전쟁을 본 두 사람은 두 다리와 전쟁을 연결하고 있다.

손광식의 다리는 관수교다. 그 때는 ‘새다리’(新橋)라고 불리던 다리다.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서울을 지키고 있습니다.’ 가슴에 태극기를 두른 국군 한 명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두 손으로 확성기를 만들어 소리쳤다. 1950년 6월 27일 저녁이었다. 6월28일 아침에 우리는 종로4가 모퉁이, 붉은 벽돌담이 있는 전매청으로 몰려갔다. 북한 괴뢰군의 탱크 한 대가 포신을 남산으로 향한 채 멈춰 있었다.… 인민군은 손을 흔들었지만 우리는 뒷걸음쳤다.… 발길을 돌리다가 우리는 여러 구의 시체를 보았다. 민간인도 있었고 군인도 있었다. 어제 군인을 보았던 개똥이가 갑자기 ‘어’하고 걸음을 멈췄다. ‘어젯밤 그 군인이다.’” “그 군인이 가슴에 두른 태극기는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머리 옆에 나뒹굴고 있는 계급장엔 육군 소위 마크가 선명했다. 내가 전쟁의 와중에 본 최초의 주검이었다.”

소설가 김용운의 ‘청계천 민들레’는 주검보다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이별을 영도교와 연결해 엮었다.

주인공은 작가의 분신인 철이와 그의 사촌 큰형 승준이. 의대생으로 좌익이었던 철이의 큰형은 6월28일 서울이 점령되자 상왕십리동 민청(민족청년단)의 단장이 되어 왔다.

서울수복이 되기 하루 전인 9월27일, 철이는 위독한 할머니를 찾아갔다가 영도교 다리 어구에서 숭인동 동쪽으로 넘어 가는 큰형을 만났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후퇴를 하고 있다.’ ‘어디로?’ ‘저 다리를 건너 미아리 고개를 넘어서 북쪽으로….’ ‘언제 돌아와?’ ‘전세가 불리해서 후퇴하지만 우리는 곧 돌아온다.’ 승준형은 잠시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저 둑길에 민들레꽃이 피면… 하고 말하고는 한 번 씨익 웃어 보이고는 다리 위로 올라섰다.”

이런 때에 승준의 할머니는 “가지마라! 가지마라! 자꾸만 손으로 누구를 잡으려고 헛소리를 했다. 임종을 앞둔 할머니는 큰집의 맏손자가 어디로 떠나려 하자 안타깝게 자꾸만 말리신 것이었다.”

그로부터 55년 후 영도교를 다시 찾은 65세의 철이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되어버린 이 다리에서 한 소년을 만나 묻는다. “얘, 이 다리 이름이 뭔지 아니?” “영도교라고 하던데요.” “그래 맞다 영도교라구!” “그런데 그건 왜 물어 보세요.” 소년의 물음에 도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육십 여년 전에 살던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영미다리라고 불렀지. 영도교, 영미다리…. 참 많은 애환과 추억이 서려 있는 다리란다!”

언론인 손광식은 1962년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하며 결론 내리고 있다.

“장사동 일사팔의 일번지에서 내가 산 기간은 20년을 채우지 못했다. 그래도 그곳은 내 마음의 영원한 고향이다. 마을 어귀에 느티나무가 서 있고 시냇물 흐르는 정취야 원래부터 없던 곳이다. 하지만 유년 시절의 추억이 숱하게 숨어 있고 아직도 우리 가문의 중심이 되어 버티고 있다. 내 유년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긴 그 집은 이제 몽땅 상가로 변해 그 형체는 간 데 없지만, 시멘트와 판자의 상가 구조물속에 옛날 용마루가 무슨 상징물처럼 지금도 뼈대로 남아 있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 2005-10-17 15:05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