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칼럼] 공직자의 '폭탄주 골프'


10월도 어느새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수확의 계절인 10월은 날씨가 대체로 쾌적해 운동 등 야외 활동을 하기에 적당한 시기다.

골프도 예외가 아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곱게 물든 단풍을 감상하며 날리는 샷은 얼마나 환상적인가.

그러니 매년 이맘때면 한 번이라도 필드를 밟아 보려고 기를 쓰는 골퍼들로 인해 골프장마다 부킹 전쟁을 벌이기 일쑤다.

그런데 이런 좋은 시절에 때아닌 ‘폭탄주 골프’ 얘기가 터져 나와 세인들의 관심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고위 간부가 한 골프 전문 월간지 10월호에 기고한 칼럼이 발단이 되었다.

칼럼에 따르면 이 간부는 지난 8월 모 지상파 방송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 앵커와 2명의 여성 골프 사업가와 함께 라운딩을 했다.

18홀을 마친 결과는 인권위 간부와 앵커의 승리였다. 게임이 끝난 후 이들은 점심 식사를 겸한 술자리를 가졌다.

여기서 앵커가 폭탄주를 제안해 술이 돌기 시작했다. 4명이 똑같이 3잔씩을 마신 후 이 간부와 앵커만 집중적으로 더 마셔 10잔 이상을 들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술에 강한 앵커가 게임에 진 여성 골퍼들에게 “복수를 하려면 한 달 후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이 상태에서 9홀 추가 라운딩을 하면 어떠냐”고 제안했고 여성 골퍼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이들은 곧바로 추가 예약을 한 후 본격적으로 음주 라운딩에 나섰다. 인권위 간부는 “폭탄주 덕에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며 플레이를 했다.

그러나 거리가 다소 줄고 퍼팅에 집중력이 떨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플레이는 여전히 가능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이어 “지금까지 전날 폭탄주를 많이 마시고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라운딩한 경험은 많지만 폭탄주를 10잔 이상 마시고 각본에 없는 라운딩을 한 추억은 누가 가지고 있을까”라고 회고하면서 “기회가 되면 직접 한 번쯤 경험해 골프와 술의 상관관계를 겪어보심이 어떨지.

또 다른 골프의 세계를 느끼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며 음주 골프를 예찬하고 이를 권장하기까지 해 눈길을 끌었다.

단순히 칼럼의 내용만 놓고 본다면 이들 4명의 주말 골퍼가 그야말로 추억에 남을 색다른 경험을 했다고 여길 만하다.

글을 읽은 사람 중에는 호기심과 부러운 마음에 “나도 한 번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 보면 재미로 간단히 웃고 지나갈 수만은 없는 요소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선 동반 플레이어 4명의 직업과 성별 구성이 관심을 끈다. 칼럼 필자가 몸담고 있는 인권위원회는 인권 보호를 목적으로 한 독립기구이긴 하지만 주요 인권 침해 시비에 대해 판단을 하는 준(準) 권력기관이다.

거기에다가 대표적인 방송사의 유명 앵커와 기업을 경영하는 2명의 여성 업자가 가세했다. 권력과 언론과 기업, 즉 권(權)ㆍ언(言)ㆍ경(經)이 엮인 것이다.

평소에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라고 하니 별다른 목적이야 없었겠지만 그 동안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무슨 무슨 ‘유착’이니 ‘커넥션’이니 하는 단어가 떠오른다. 오해를 받으려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팀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이번 논란의 핵심인 음주 골프의 부적절함이다. 대부분의 골프장에서는 음주 라운딩을 금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순조로운 경기 진행에 방해가 될 수 있고, 미스 샷으로 인한 부상 등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모범적이고 몸가짐을 바로 해야 할 인권위 간부가 술, 그것도 폭탄주를 마신 상태에서 골프를 치고, 그것을 예찬하고 권장하는 글까지 썼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다. 물의가 빚어지자 인권위 자체에서 조사를 벌인다고 하니 결과가 주목된다.

이번 ‘폭탄주 골프 예찬’ 칼럼 파문은 공직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공직자는 아무리 순수한 마음이더라도 오해를 살 수 있는 행동은 삼가야 하며, 골프장 등 다중 이용 시설의 질서를 지키고 품위를 유지하는데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골프 평론가 헨리 롱허스트는 “골프를 보면 볼수록 인생을 생각나게 하고, 인생을 보면 볼수록 골프를 생각나게 한다”고 말했다. 가슴에 와 닿는 얘기다.


김양배 부국장


입력시간 : 2005-10-25 10:31


김양배 부국장 ybki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