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이번 개각에서 총무상에서 외상이 된 아소 다로(65)는 11월1일 조심스럽게 취임 소감을 기자들에게 말했다.

“새 추모시절(야스쿠니 신사)이 만들어진다고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오히려 일본에서 떠드는 분들이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일본이 미군에 점령되었을 때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의 외손자며 1만5,000명의 조선인 징용자가 일한 아소탄광의 창설자 아소 다치키의 증손자인 그는 9선 의원이다.

그는 2003년 3월에 총무상으로서 “창씨개명은 조선인들이 ‘성씨를 달라’고 한 것이 시발이다”고 말했다. 비판이 일자 5월에 도쿄대 강연에서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일본의 언론은 ‘조선인의 멸시’, ‘일본인의 영광을 신념으로 가진 귀족가문 정치인’으로 보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전후 일본의 부흥을 “다행스럽게 한국전쟁이 터져 일본에 도움이 됐다”고 말할 정도로 일본 위주의 보수 우파며 교과서 수정 후원자다.

이런 아소 외상의 ‘조선인 관’, 역사 인식은 어디서 출발했을까. 해답이 될는지 모르겠다.

평북 정주 태생으로 올해 81세인 한림대 일본학 연구소장을 지낸 지명관 박사는 작년 8순을 맞아 발간한 ‘한일 관계사 연구 – 감정에서 공존까지’에서 한일간에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이런 일(망언, 취소, 사표)’을 여러 면에서 다루고 있었다.

지 박사는 1972년 10월 유신이 발동된 후 일본으로 망명해 1993년까지 머물렀다. 좌파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잡지 ‘세카이(世界)’에 TㆍK생이란 이름으로 ‘한국에서 온 편지’를 썼다. 그가 1999년 한일합동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이광수와 일본’ 논문에는 아소 외상의 ‘창시개명’ 발언에 대한 배경설명이 있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창씨개명)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李光洙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香山光郞이 좀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1892년에 태어나 14살 때 을사늑약을 보고 말이 막혔던 ‘흙’의 작가며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춘원 이광수가 1940년 ‘향산광랑’으로 이름을 바꾸며 쓴 글이다.

이 글이 아소 외상이 느낀 ‘이름을 달라’고 한 것의 시점일까.

지명관 박사는 ‘이름을 달라’고 하지 않은 좋은 예를 들고 있다. 춘원보다 9세 아래로 평북 용천에서 1901년 태어나 ‘뜻으로 본 한국역사’(1939년 씀. ‘성서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1965년 완결한 책)를 쓴 함석헌(1989년 88세로 서거)이다.

함석헌은 ‘창씨개명’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일본식으로 창씨를 하라는 기한의 마지막 날이 되던 날 임종이 가까운 아버지 앞에서 단 둘밖에 없는 형제끼리 마지막으로 의논을 하다가 저는 고치겠다는데 나는 감히 그러자는 말이 나오지 않아 감히 죽을 각오를 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아니 고치겠다’ 선언을 하고 서로 딴 길을 걷기로 한 다음 얼마 아니 있다가 나는 친속을 데리고 평양 만경대 송산리로 나갔습니다.”

그때까지 도쿄고등사범학교(사범대학) 문과 1부 역사과를 나와 오산고등학교에서 역사 선생(1928년)을 하던 그는 송산농원을 가꾸며 해방을 맞는다.

역사가 함석헌에게 ‘이름 바꾸기’를 거절하게 된 역사적 접촉은 1923년 9월1일 일어난 관동대지진이었다. 그에게 비친 ‘조센진’ 학살에 나선 일본인, 일본국가체제, 그 운영의 모습을 몸소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함석헌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예비학교 준비생이었다. “조센진이 우물에 독약을 뿌렸다”, “불령선인이 곧 기습해 온다” 등의 유언비어, 이를 조작해 계엄령을 칙허없이 내린 일본의 군ㆍ경찰ㆍ재향군인회등 자경단의 ‘덮어 씌우기’에 도쿄의 ‘조센진’ 2만여명 중 6,000여명이 살해됐다.

“… 평소에 그렇게 인정 있고 맑은 사람들, 아침마다 만나면 ‘오하요 고자이마스’, ‘이이 오겡기 데스네’하는 사람들, ‘길은 길동무가 있어야, 세상은 인정이 있어야’하는 사람들, 말마다 ‘기리 닌조’(義理 人情) 라는 사람들, 그 사람들 그럴 줄 몰랐습니다. 그 엇메었던 일본도, 그 깎아 들었던 대창, 그 증오에 타는 눈들, 그 거품을 문 이빨들, 어디서 그것이 나왔을까?”

“나는 정말 불길 속에 앉아 학살의 소식을 들으며 젊은 마음이지만, 슬펐다. 야, 일본이 요것밖에 못 되느냐 했다. 밉기 보다는 가여웠다.”

역사가 함석헌은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을 발생 50년인 1973년 9월 이를 회상하며 결론 내렸다. “문제는 (일본의) 국가주의다. 그것이 동양평화란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켰고, 한국을 먹었고, 혁명(‘대지진’에 따른 공산 사회주의자의 폭동)을 막기위해 조센진을 제물로 잡았다. 혁명을 왜 무서워하는가? 그것으로 일본이 망할까 봐? 아니다. 혁명으로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망하는 것은 지금 있는 정권이다. 대일본제국은 전체 일본이 아니다. 어떤 수의 사람의 것이다. 국가란 언제나 그렇다.”

엉뚱한 대안이 될는지 모르겠다. 한국 외교통상부는 함석헌 역사가가 1973년 9월에 쓴 ‘내가 겪은 관동대진재’를 빨리 일역해 아소 외상에서 전했으면 한다. 지명관 박사의 ‘이광수와 일본’은 일본어 논문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한국 외교통상부 장관은 두 글을 꼭 아소 외상에서 전해야 한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