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각(10월31일) 후 11월7일 중의원에 나온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연립당인 간자키 다케노리 공명당 대표가 주문한 발언에 대해 답했다. “좋은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유다.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자유라고 생각한다.”

간자키 대표는 11월5일 공명당 전국대표자회의에서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정권의 중추인 총리, 외상, 관방장관은 참배에 대해 자숙하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개각에 앞서 10월28일 참배 문제(10월17일)로 방일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에게도 말했다. “한국 국민으로서는 이해하기 곤란하겠지만 전쟁에 대한 반성의 뜻으로 참배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달라. 4월 반둥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서 표명한 과거사 인식에서 조금도 변화가 없다.”

고이즈미 총리는 2001년 4월14일 총리 취임 기자회견에서 피력했다. “전몰자 위령제가 행해지는 그날(8월14일), 전몰자들의 희생 위에 오늘의 일본이 있다는 마음을 표하는 것은 당연하다.”

1985년 당시 총리였던 나카소네가 야스쿠니를 참배한 후 여론에 밀려 중단된 뒤 16년 만에 다시 시작한 고이즈미 총리 참배의 파장은 계속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전몰자 희생 위에 오늘의 일본이 있다”는 역사의식, 문화관, 종교관에 대한 일본의 자유주의 학자들, 한국의 지일 학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다카하시 데쓰야는 1956년 생으로 1942년 생인 고이즈미보다 18년 아래다. 도쿄대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교수다. ‘반전, 반차별, 반식민주의’를 내걸고 등장한 잡지 ‘전야(前夜)’를 창간한, 참여하는 지식인이다. 그는 1994년부터 ‘야스쿠니 문제’에 대해 연구에 나서 올 3월 책을 냈다. 의외로 이 책은 30만 부 이상이 팔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일본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전후세대 지식인으로 역사의식이 투철하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고이즈미를 비롯 전전(前戰) 세대들이 인식하는 메이지 이후 일본제국이 몰아부친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전후 민주주의 세대로서 전전세대의 전쟁에 대한 ‘기억’과 ‘회상’의 그릇됨을 비판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1867년 메이지 유신부터 2차 대전까지의 12차례 전쟁에서 전사한 246만6,000여 주의 영령(英靈)이 있다. 조선 출신 전몰자는 2만1,000여 주.

다카하시는 고이즈미 등이 “이들 영령의 희생 위에 오늘의 일본이 있다”는 당연에 대해 짙은 의혹과 회의를 느꼈다. 특히, 고이즈미의 ‘오늘’은 파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고 그 때문에 다시 해방을 기다리는 ‘전야’라고 보고 있다.

그가 10년 넘게 야스쿠니 신사를 통해 추적한 ‘오늘의 일본’의 속 마음을 특히 우리는 주목해볼 당연이 있다.

그의 눈빛과 필치는 날카롭다. “야스쿠니 논리의 본질은 전사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을 정반대의 기쁨으로 전환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슬픔이나 아픔의 공유, 즉 추도나 애도가 아니라 전사를 기리며 칭찬하고 미화하면서 공적이나 내세워 뒤따라야 할 모범이라고 하는 것, 즉 현창(顯彰)인 것이다.”, “야스쿠니 제사를 슬픔의 제사라고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야스쿠니 제사는 슬픔을 억압해 한사코 전사를 현창하고자 하는 국가 제사인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과거 일본 제국의 이데오르기가 그대로 살아 있는 공간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무종교의 국가 전몰자 추도 시설로 위장한 종교적인 시설로 국민에게 그 영령을 본 받으라고 호소하는 현창 시설이다.”

다카하시와 학연은 없지만 그보다 1년 뒤에 태어난 박유하 세종대 일문과 교수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9월20일 한ㆍ일간에 논란을 일으키는 교과서, 위안부, 야스쿠니, 독도 문제를 다룬 ‘화해를 위해서’를 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의 게이오, 와세다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딴 그는 야스쿠니에 대해 43쪽을 할애했다.

야스쿠니 신사를 보는 박유하 박사의 역사의식은 다카하시와 비슷하다. 일본인이 아닌 피해자인 제 3자의 시각에서 야스쿠니 문제를 꿰뚫었다.

“추모의 행위는 ‘기억’하는 일을 통한 역사교육의 장(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추모를 거부하기보다 이제 다른 추모의 방식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 요구된 기억-국가를 위해 몸바친 행위를 ‘희생’으로 기억하고 ‘숭고’한 것으로 생각하는–을 거부하고 그들의 행위가 그들 나름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가해의 구조를 지녔는지, 그로 인해 어떤 피해자들을 만들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어떻게 은폐되고 망각되어 그들이 다시 그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면 죽은 이에 대한 추모는 새로운 의미를 띨 수도 있다. 한국과 일본, 혹은 한국 내 과거의 기억을 둘러싼 분열과 갈등은 그때 치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엉뚱한 결론을 내려본다. 고이즈미 총리는 다카하시 데쓰야, 박유하 두 교수와 정담(鼎談)을 나눠봤으면 좋겠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