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5일 수석ㆍ보좌관회의에서 조금은 웃는 모습으로 말했다.

“황우석 교수팀의 줄기세포 연구성과에 대한 검증문제는 이 정도에서 정리되기를 바란다. 황 교수팀의 연구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계속 지원하겠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11월27일 ‘청와대 브리핑’ 기고 ‘줄기세포 관련 언론 보도에 대한 여론을 보며’가 몰고 온 파장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노 대통령은 기고문 말미에 이렇게 썼다. “이런 걱정이 되던 차에 기사 하나를 발견하고 다소 마음이 놓인다. ‘일그러진 애국주의가 번진다’는 한겨레 신문기사다.

‘아! 그래도 우리 사회에 비판적 지성이 살아 있구나.’ 물론 한겨레도 좋을 때보다 불만스러운 때가 훨씬 많다. 신문이니까. 그래도 나는 이런 기사에서 미래를 본다. 반가운 김에 한겨레 기사 전문을 소개한다.”

한겨레의 기사는 황우석 교수의 11월24일 기자회견을 보고 유선희, 정혁준 기자가 쓴 것이다.

“일부 누리꾼들은 22일 황 교수팀의 난자 채취 문제들을 보도했던 ‘피디수첩’에 대해 마녀사냥식 공격을 가하고 나섰다. 황 교수팀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매국행위’로 몰아가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이에 대해 언론학자 등 전문가들은 사회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리려면 비이성적ㆍ감성적 애국주의에 빠지지 말고 이성적으로 문제를 성찰하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고 지적했다”가 리드 부분이다.

노 대통령의 기고문에서 드러난 것은 노 대통령의 신문에 대한 인식이다. “물론 한겨레도 좋을 때보다 불만스러울 때가 훨씬 많다. 신문이니까”의 대목이 그의 신문관을 명확히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기고문을 비판한 오마이뉴스의 ‘뉴스 가이드’ 난의 김종배 미디어 비평기자의 11월28일자 기사를 보지 않은 것 같다. 그러기에 5일 청와대 회의에서 “이 정도에서…”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기자협회보’, ‘미디어 오늘’에서 미디어 비평기자로 이름을 얻은 김종배 기자는 “관용대신 ‘갈등’만 키운 노 대통령 글”이라고 대통령의 기고문을 분석했다.

“대통령이라고 입 닫고 살라는 법은 없다. 대통령도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구가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표현을 엄격히 관리하고 파장을 면밀히 고려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대통령은 국민의 한 사람임과 동시에 국가를 대표하는 원수이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아마 김종배 기자의 글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김 기자가 예측한 파장이 갈등을 넘어서는 것을 모른 채 “이 정도에서…”를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신문이니까’의 미디어관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대답을 2004년 5월 번역되어 나온 해리 마이하퍼의 ‘링컨은 신문과 싸우지 않았다’에서 찾아본다.

해리 마이하퍼(1924~2002)는 웨스트 포인트를 나온 예비역 육군대령. 국방부의 지원으로 미주리 신문 대학원에서 군과 언론 관계를 연구해 석사학위를 땄다. 한국전 참전 용사다.

그는 남북전쟁(1861~1865) 때 링컨과 군 출신 그랜트 대통령을 그때의 미디어인 신문, 저명한 기자, 편집자, 칼럼리스트, 사주들이 어떻게 다루었나를 고찰했다. 2001년 12월에 나온 ‘링컨은 신문과…’의 원 제목은 ‘말들의 전쟁’이다.

그때가 1862년 7월이다. 남북이 서로 싸운 지 1년이 지나 연방군인 북군이 버지니아의 불런에서 남군인 연합군에 패배한 때였다.

이때 영국 타임스의 기자 윌리엄 럿셀은 자신이 패주하는 연방군에 싸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한 장교가 대답했다. “우리가 대패 했다는 의미입니다.”

남부군은 워싱턴 시를 육박하고 있었다. 럿셀은 상황의 모습을 런던에 전했다.

“지휘관도 없이 센트레빌에서 도망쳐온 병사들로 혼잡했고 그 병사들은 거의 석 달 동안이나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폭우에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수심이 가득찬 사람들로 가득 찼고, 동요하고 있는 정치가 집단은 호텔 복도나 모퉁이 술집에서 서성거렸다.”

그는 이런 패배의 원인이 전쟁을 부추긴 뉴욕의 신문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수치스러운 개인적 특성, 지치고 비참하게 좌절하고 인정 받지 못하는 뉴욕사회의 천민들에 의해 이끌리고 있기 때문이다”고 미국신문을 조롱했다.

그러나 그때 럿셀은 워싱턴 전선 현장에 없었고 불런 전투에 종군하지 않았다. 미국 신문들은 럿셀의 기사를 거짓이라고 아우성쳤다. 이런 럿셀의 과장과 혹평에 대해 링컨 대통령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럿셀은 9월8일자 일기에 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새로 구입한 마차 안에 있는 링컨 부부를 만났다. 평상시와 같은 내 인사에도 대통령은 그리 달갑지 않게 대꾸했고 링컨 부인 역시 그다지 상냥하지 않았다.”

마이하퍼는 분석했다. “물론 링컨은 럿셀의 기사가 과장된 혹평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어떤 시대에도 언론을 공격하는 것에 면죄부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 기준에 맞게 행동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마이하퍼의 ‘…신문과 싸우지 않았다’를 꼭 읽어 보길 바란다. 김종배 기자의 “관용 대신 ‘갈등’만 키운…” 기사를 다시 보길 바란다. ‘…신문이니까’의 신문인식을 바꿨으면 한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