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소주는 서민이 마시는 술, 맥주는 그보다 좀 나은 계층이 마시는 술, 양주는 부자가 마시는 술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때가 있었다. 그 시절 서민들은 “소주는 쓴 맛으로 마신다”는 말과 함께 잔을 꺾으며, 취하며, 쓰디 쓴 삶을 달랬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소주는 누구나 즐기는 대중술, 국민술이 되었다. 요즘엔 많은 국민들이 ‘소주와 삼겹살’을 최고의 회식 메뉴로 꼽을 정도다. 소주의 못 말리는 인기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무엇보다 1990년대 중반 무렵 25도 벽이 무너지면서 순하고 부드러운 맛으로 폭 넓은 고객층을 확보한 게 가장 큰 이유다.

가령 젊은 여성들조차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소주라면 손사래부터 치는 쪽이 태반이었는데, 요즘엔 “한 병은 기본”이라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발그스레한 얼굴로 “한 병 더” 외치는 여성도 쉽사리 눈에 띈다.

그만큼 소주는 순해졌다. 소주 맛의 마지노선을 놓고 20도니, 그 아래도 가능하다느니 하는 논쟁까지 벌어지는 술판이니 더 순한 술이 대중화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다.

이 같은 변화 이면에는 소주 업체들의 생존 전략이 숨어 있다. 자도주(自道酒) 의무판매 제도가 완전 폐지되면서 고객의 입맛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업체들은 살아 남기 힘든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품질과 함께 시장을 주도하는 마케팅이 그만큼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소주 무한경쟁 시대는 묘한 아이러니도 낳고 있다. 소주는 갈수록 ‘순’해지지만 업체 간 경쟁은 점점 더 ‘독’해지고 있다.

요즘 전국 곳곳에서 전선을 형성하고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는 업체들을 보고 있자면 술 맛이 싹 가실 지경이다. 이 전쟁에서 지는 업체들은 예전의 소주처럼 ‘쓴 맛’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