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총리관저에서 3월 8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입을 열었다.

“고이즈미 총리의 좌우명이 ‘무신불립(無信不立·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인 것으로 안다. … 국가 간에도 신뢰와 신의를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재임 중에 외교적으로도 한국, 중국 등 이웃나라로부터 존경을 받는 총리가 돼 주면 좋겠다.”

고이즈미 총리는 예정시간보다 10분을 넘겨 박 대표 이야기를 경청하고 호응하는 분위기에서 덕담을 했다. “박 대표를 만나보니 한국의 여성 대통령이 일본에서의 여성 총리보다 먼저 나오겠다.”

박 대표는 다음날 일본기자클럽에서 ‘21세기 한·일 관계’에 대해 주제연설을 한 후 여러 질문에 답했다.

“동맹(한·미 간), 우방(한·일 간)은 더 깊은 관계로 유지, 발전시킨다는 게 내 생각이다. 동맹, 우방관계를 복원하려는 나의 방법은 노무현 대통령의 방법과 분명히 다르다. 감정으로 대응했다가 대화가 끊어지면 두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독도는 한국 영토다. 한국 영토를 인정하면 해결된다.”

“내 개인적으론 북한 때문에 어머니를 잃었다. 가슴에 묻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미래를 위해 200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만나보니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신뢰를 구축하면 남북 간 평화정착은 반드시 이뤄질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김 위원장은 한국의 경제성장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가 취한 조치에 대해 비판이 있지만 이해하고 지지한다는 얘기도 있다.”

“(차기 대선에서는)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 현재는 당 대표인 만큼 출마와 관련된 발언을 삼가는 게 좋겠다.”

“한국 정치는 아직 남성 중심이지만 국민의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아니라 나라를 얼마나 잘 운영하는지 여부가 선택 기준이 될 것이다. 내가 힘든 것은 여성 정치인에 대한 편견이라기보다는 개혁이 안 되는 정치문화다.”

이날 기자클럽 오찬 강연회 사회자는 덕담을 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기자클럽 초청 연설 이후 대통령이 되셨다. 차기에 운좋게 대통령으로서 이 자리에 오시게 된다면 그때도 크게 환영해드리겠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은 8,9일의 박 대표 행적을 “초당외교 측면에서 문제가 많다”며 공세를 폈다.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중대사안으로 보고 예정된 셔틀 정상외교도 중단된 민감한 시점에 야당 대표가 이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한마디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은 점에 유감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이 그의 '포스트'에
대해 침묵한 것이 박근혜 대표
에 대한 일본의 '덕담'에 이르
게 한 것이 아닐까.

정 의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 감정을 무시하고, 3·1절 직후 방일해 고이즈미 총리와 만남을 갖고 정부 외교정책과 엇박자를 낸 것이 국익외교, 초당외교에 합당한지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근태 최고위원도 ‘엇박자’공세를 거들었다. “3·1절 골프의 적절성에 대해 한나라당이 비판하고 있지만, 3·1절이 있는 3월에 일본을 방문해 지도층을 만나는 것은 적절한지 박 대표에게 묻고 싶다.”

김 최고위원은 주장했다. “과거사 정리의 핵심인 야스쿠니 신사의 전범에 대해서는 한·중을 비롯한 양심인사들의 동의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야당 대표가 일본 총리를 만나 야스쿠니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국민이 동의할 수 없다.”

고이즈미 총리를 비롯한 일본의 ‘포스트 고이즈미’를 노리는 인사들의 박 대표에 대한 덕담. 이를 노 대통령의 대일 외교에 대한 ‘엇박자’외교라고 주장하는 ‘포스트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대선주자들.

이들의 말 속에 감춰진 뼈를 아사히 신문 와카미야 요시부미 논설주간은 2월27일자 그의 칼럼에서 밝혀 냈다. (와카미야 논설주간에 대해서는 ‘어제와 오늘’ 2005년 4월6일자 ‘와카미야의 몽상’, 2005년 4월13일자 ‘한국과 일본국’에서 보도)

일본기자들의 단장으로 ‘포스트 노무현’의 한국을 취재한(2월18~25일) 와카미야 주간은 칼럼에서 요약했다.

“인터뷰해본 결과 ‘민족’이 ‘동맹’보다 더 강한가 라는 질문에 대해 박근혜 대표의 답변은 ‘동맹’편에 가깝고 정동영 의장과 김근태 최고위원의 답변에는 ‘민족’의 피가 더 짙게 깔려있다고 본다.”

“노 대통령 측은 면담을 거절했다. 이유는 국민지지율이 낮은 집권 4년째를 맞는 시점, 한·일 관계가 긴장된 때에 일본 미디어를 만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었다.”

와카미야 주간은 빗댔다.

“취재해본 결과 두 나라 간의 관심사는 너무나 넓었다. (한국인의 관심사 중에는) 누가 고이즈미 뒤를 잇느냐는 질문이 태반이었다.” 노 대통령이 그의 ‘포스트’에 대해 침묵한 것이 박근혜 대표에 대한 일본의 ‘덕담’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닐까.

대답을 얻으려면 노 대통령은 와카미야 주간과 인터뷰나 대담을 가지는 게 좋겠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