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3월 21일자 사설 ‘복지병폐가 부른 프랑스 대학시위’가 눈길을 끌었다.

26세 미만의 노동자를 채용시 2년 이내에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는 최초고용계약(CPE) 법안을 추진키로 한 프랑스 정부와 이에 반발한 대학생, 노동계 간의 3월 28일 예정된 총파업에서의 충돌을 우려한 글이다.

또 4월 국회 본회의 처리를 앞둔 비정규직 법안, 정부가 검토 중인 국민연금 개혁에 미칠 파장도 우려하고 있다.

“복지와 고용 시스템은 한번 혜택을 올리게 되면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권이 함부로 선심 쓸 대상이 아니다. 이미 기득권으로 굳어진 혜택을 누가 쉽게 포기하겠는가. 프랑스같이 세대 간 갈등으로 번지면 대응하기도 고약하다. ‘자기들은 다 누려놓고 왜 우리 세대에겐 고통을 강요하느냐’는 젊은 세대의 항변을 공권력으로 누르기도 어렵다.”

“프랑스 시위는 강 건너 불이 아니다. (···) 비정규직 법안이나 국민연금 개혁도 본질은 마찬가지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와 청년층 반발을 무마하면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가 쉽지 않다. 이런데도 저소득층 긴급복지 지원 등 선심성 정책이 쏟아지고 있다. 17대 국회 들어 의원발의 법안 3,000여 건을 시행하려면 매년 138조원이 들 판이다. 버는 데는 관심이 없고 쓰는 데만 관심이 있으니 걱정이다.”

이 사설의 논조는 차분하지만 중앙일보 박경덕 특파원이 현장 르포기사로 쓴 3월 18일, 20일 파리의 시위 모습은 ‘1968년 혁명’을 연상시키는 긴박한 모습이다.

소르본 대학이 있는 라탱 구역에서 ‘부르주아를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던 소르본 대학생 플로리안 루이(22·역사학)는 말했다.

“영국, 미국같이 취업 기회가 많은 곳이라면 노동유연성을 말할 수 있지만 실업률이 높은 프랑스에선 안 될 말이다. 약자를 배려해온 프랑스식 사회제도를 버리고 강자만 살아남는 영미식 고용제도를 도입해선 안 된다.”

이 날의 시위는 38년 전 68년 5월 1일~12일 라탱 지구에서 10일간이나 바리케이드를 치고 혁명 직전인 콤뮨을 이뤘던 때와는 달랐다. 그때의 파리는 10년간 집권한 드골의 ‘위대한 프랑스’의 권위 및 엘리트 체제를 개혁하려는 혁명적 모습이었다.

‘세계체제론’의 저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그때의 ‘68년 파리’에 대해 요약했다. “이제 껏 세계 혁명은 단 두 번뿐이었다. 한 번은 1848년, 그리고 또 한 번은 1968년에 일어났다. 두 번 모두 역사적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둘 다 세계를 바꿔 놓았다.”

2006년 3월의 파리 시위는 현실과 밀접한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한 항의에 집중되어 있다. 체제 개혁을 비롯한 이데올로기적 구호는 없다.

38년 전의 ‘혁명’을 지도했던, 지금은 유럽의회 의원인 다니엘 콩방디는 파이낸셜 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때엔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을 갖고 공격적인 시위를 벌였지만 지금은 변화와 생활의 불안정을 두려워하며 방어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68년 당시 파리 근교에 있는 낭떼르 대학의 사회학과 학생으로, 여학생들과의 만남의 장소가 없는 ‘황무지같은 대학 캠퍼스’를 바꾸라며 체제개혁을 부르짖은 콩방디.

그가 주도한 67년 첫 농성은 “서로 만날 카페조차 없는 캠퍼스에 여학생 기숙사 방문 금지는 안 된다”는 여학생 기숙사 점거에서 시작됐다. 후에 ‘68세대’가 된 그들은 10일간의 콤뮨으로, 69년에는 국민투표를 통해 드골에 불신임표를 던져 그가 물러나도록 했다.

파리에만 1968년의 혁명 전야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68년의 서울에선 혁명
보다 더 무서운 전쟁 전야가 있었다.

그러나 2006년 3월 시위에 참가한 소르본 대학 자크 엘만(21·영문학)은 오늘의 현실을 말한다.

“남들은 엘리트 학교에 갔다고 부러워하지만 취업기회가 워낙 적어 졸업 후 직장을 잡을 가능성이 상당히 적다. 우리가 구세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곤 희망 없는 고실업·고경쟁 사회뿐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화나게 한다.”

파리에만 1968년의 혁명 전야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68년의 서울에선 혁명보다 더 무서운 전쟁 전야가 있었다.

지난 3월 17일 여야 원내대표들이 노무현 대통령과 만찬을 했다. 파리의 시위 전야였다.

노 대통령은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과거 임금들은 변복을 하고 돌아다녔는데 그렇게 나가본 적은 없느냐”는 질문에 답했다. “얼굴도 많이 알려진 데다 경호에도 너무 부담을 줘 많은 사람들이 말려서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

“청와대 외곽의 철조망이 4중으로 둘러쳐져 있는데 대부분 철거했다. 그동안 이런저런 형식들을 많이 개방했는데 이제는 마음도 개방하고 싶다.”

청와대 외곽에 쳐진 4중의 철조망을 많은 사람들이 잊은 1968년 1월21일은 북한의 124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러 온 날이다. 그 이후 ‘68 전쟁 전야’의 서울은 교육헌장 선포, 3선 개헌, 10월 유신, 10·26사태로 이어갔다.

노 대통령은 2006년 3월의 파리 사태를 지켜보며 1968년 1월 31일 제63회 임시국회에서 1·21 사태에 대해 발언한 공화당 이만섭 의원(제16대 국회의장)의 말을 되살려 보기를 바란다.

“이번 사건은 고위 공직자들의 무사안일 때문입니다. 관계 국무위원은 마땅히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본 의원이 듣기로는 이런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일부 장관들은 골프를 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공비들은 가는 곳마다 군 기관원을 사칭했고 그때마다 별 거리낌 없이 검문을 통과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는 정보기관에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남용해 왔기에 기관원이라고 하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던 사회풍조를 공비들이 이용한 것입니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