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큰 스승’ 함석헌 선생이 탄생한 지 105년 되는 해다.

2003년 4월에 나온 ‘큰 스승 함석헌 깊이 읽기’ 시리즈의 제1권 ‘뜻으로 본 한국역사’(한길사刊) 뒷면에는 선생을 기리는 짧막한 코멘트가 실렸다.

“함석헌 선생은 어렵고 험난한 이 시대 큰 스승으로 우리들 가슴 속에서 오래오래 함께 하리라 믿는다.” 법정 스님의 말이다.

1989년 2월4일 서거한 후 생긴 함석헌 선생 기념사업회 발족위원장인 장기려 박사는 “함석헌 선생의 사상은 500년 후에야 널리 알려질 것이다”고 내다봤다.

“함석헌이라는 한 인격의 불화로를 버티고 있는 세 개의 버팀목은 믿자는 의지, 나라에 대한 사랑, 과학적이라는 양심, 이 세 가지였다.” 한신대 신학과 교수며 ‘씨알의 소리’ 제2세대 편집위원이기도 했던 김경재 박사의 요약이다.

“함석헌 사상은 동서문화의 창조적 융합이며 세계에 내놓은 한국사상이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으로 한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씨알사상연구회 회장 박재순 교수의 짧막한 해석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이 한 권이 있어 20세기 한국철학이 있었다고 단언한다.” 연세대 철학과를 나와 독일 마인츠대학에서 칸트 철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딴 ‘학벌 없는 사회’ 운동 주창자인 김상봉 철학 교수의 결론이다.

‘큰 스승’, ‘큰 사상가 함석헌’ 발간에 이어 105주년 탄신일에 맞아, 올해 79세인 고려대 명예교수며 미국 텍사스 A&M대학 화학박사인 김용준은 ‘내가 본 함석헌’을 펴냈다. ‘큰 스승’, ‘큰 사상가’란 타이틀이 없는 “함석헌 생애의 완벽한 증인이자, 사상적 동지였던 김용준”이란 표제가 특이하다.

김 교수가 함석헌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49년 봄, 어느 일요일 오후. ‘성서 강해 함석헌’ 광고문을 본 후였다. 이때 회색 두루마기에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 모습의 강사는 49세였고 서울대 화공과 학생이었던 김용준은 22세였다.

김 교수는 함석헌에게 ‘큰 인간’의 타이틀을 주었다. 그 이유는 1962년 2월9일~63년 6월까지 미국을 방문해 머문 함석헌이 쓴 편지를 받고서였다.

그와 워싱턴에서 10여 일을 함께한 김 교수는 텍사스대학으로 학위 공부를 하러 떠난다. 함석헌이 쓴 편지의 앞머리는

“김형께.
편지 받은 지 여러 날 되었지만 회답을 못 드렸습니다. 안녕하시오?…”였다.

김 교수는 ‘내가 본 …’에서 이 대목의 감격(?)을 적고 있다. “… 어떻게 스물일곱 살이나 아래인 나에게 ‘김형’이라는 호칭이 나올까? 선생님의 체취가 이 한 마디에서도 물씬 풍긴다.”

이런 감격(?)은 김 교수가 함석헌이란 ‘큰 인간’의 환영 속에 자기를 회고하고 그 시대를 회고하는 ‘내가 본…’ 책에 가득하다. ‘큰 사상’, ‘큰 사상가’로 함석헌 선생을 늘 생각하지만 그가 던져준 참된 그림은 ‘큰 인간’이란 것이 김 교수의 결론이다.

김 교수에 의하면 '큰 인간' 함석헌이
제일 싫어 한 사람은 정치인들이었다.
김 교수가 보기에 그는 '생각하는 사람'
이었지 '정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함석헌은 1987년 6월 29일 서울대에 담도 암으로 입원, 입·퇴원을 거듭하다가 89년 2월 4일 새벽에 서거했다. 잠시 퇴원했던 88년 5월 10일 화요일, 마지막 노자 모임에서 함 선생은 그가 졸업했고 10년간 교편을 잡았던 오산중등학교 이사장 남강 이승훈(기미독립선언문 서명 33인 중 한 명)에 대해 강의했다.

김 교수의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시 (학생이) 남강 선생님을 찾아와 어느 젊은 선생이 유곽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고자질하자 남강이 그 학생에게 ‘야, 그 선생은 자지 없다더냐’라며 나무랐다는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 내 노트에는 이런 것도 있다. ‘육체의 법칙은 이것도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금식은 내 마음에 좋아서 해야 한다. 정신 통일의 경지가 있다. 영계(靈界) 비슷한 지경에 이를 수 있다.”

함석헌의 마지막 공식행사는 88서울올림픽의 서울평화대회 위원장으로서의 활동이었다. 일부에서 “어떻게 선생님이 노태우 대통령과 나란히 자리에 앉을 수 있느냐”는 비난이 많았다.

병상에 있던 그는 단호히 말했다. “아니 그러면 평화를 사랑한다면서 나 싫어하는 사람과는 악수도 하지 말란 말이냐!” 그는 불편한 몸을 추스려 성화점화식에 노 대통령과 함께 불을 켰다. 그게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

김 교수에 의하면 ‘큰 인간’ 함석헌이 제일 싫어 한 사람은 정치인들이었다. 김 교수가 보기에 그는 ‘생각하는 사람’이었지 ‘정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1969년 말 장면 정권 때 재무부 장관을 지낸 김영선이 함석헌 선생을 찾아왔다.

“아니 글쎄 나보고 신민당 당수가 되어 달라는 거야. 답답해서 나는 본래 정치하는 사람은 못되게끔 태어난 사람이라고 타이르고 끝까지 거절 했더니 ‘선생님께서 그렇게 사양하시면 저도 이제 제 밥벌이나 해야 되겠습니다’ 하고 가버리더군.”

김영선은 그 후인 70년 경제과학심위위원회 상임위원이 되고 3월에 제2대 통일원 장관, 74년 1월~79년 초까지 주일대사를 역임했다.

김용준 교수는 임종을 지켜보는 등 40여 년간 함석헌 선생님을 보며, 배우며, 기록했다. 선생님은 ‘큰 사람’이었다.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대선에 나설 후보들은 함석헌 선생의 전모가 잘 요약되고 해석된 ‘내가 본 함석헌’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