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1일에 출간된 소련 작가들의 해방 직후 북조선 방문기인 ‘우리는 조선을 다녀왔다-1946년 북조선의 가을’에는 왜 이들이 북조선에 갔는지의 이유가 뚜렷하지 않다.

다만 이들 작가들이 방문할 때인 46년 8월~12월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책임비서였고 소련 군정당국이 조직한 임시정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인 김일성은 ‘김일성 장군’으로 불렸다.

‘우리는 조선을 다녀왔다’에는 작가 기토비차 볼소프가 쓴 34세의 김일성의 모습이 생생하다.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쩍 벌어진 어깨에 명랑하면서도 밝은 모습의 젊은이였다. 그는 흰색의 양복을 입고 있었다. 흰색 셔츠의 옷깃은 열려 있었다.”

그는 통역관 문일에게 인터뷰 시간은 30분간이라고 말했다. 북조선 해방 후에 해온 일에 대한 물음에 김일성은 답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직접 다니며 물어보십시오. 농촌의 농민들이니 공장의 노동자들이나 모두 당식들에게 가식없는 대답을 줄 것입니다. 당신들은 마음대로 다니며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감출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친구의 눈으로 우리의 긍정적인 면을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소련에서 온 사람들은 물론 우리의 친구들이지요.”

‘김일성 장군’은 그해 3월 5일 실시한 토지개혁, 노동시간 8시간제, 남녀평등 등의 혁명적 조치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이 없었다.

그는 작가들에게 단군릉이 있는 고도면(현재 평양시 강동군)의 농촌을 볼 것을 권했다. 작가 볼소프는 고도면을 비롯 전국 68만2,760호의 농가가 1.5정보의 농지를 새로 받았고 김일성에게 3만여 통의 감사편지가 몰렸고 몇십 통의 혈서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볼소프 등을 안내한 박정애(일제 때 지하공산당원 민주여성동맹위원장, 후에 선전상)는 푸른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는 윤효순이란 노인에게 요즈음 세상에 대해 스스름 없이 말하라고 했다.

소련 작가들은 윤 노인이 자주 뱉는 “살암직하우”가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살아갈 만하우”라고 통역했다.

윤 노인은 ‘살암직’ 타령을 계속했다. “윤 노인네는 마누라, 자식, 손자들을 합하면 식솔이 10명이었다. 그는 4정보의 토지를 분배받았으며 이미 여덟 가마니의 밀을 수확하였다. 예전 같으면 적어도 지주에게 여섯 가마니를 바치고 나머지도 일본인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지금은 새 법령에 규정한 대로 국가에 두 가마니를 바쳤다. 예전에는 풍년이 든 해에도 한 달 반이나 두 달밖에 먹을 수 없었으나 지금 노인네 집에는 이미 여섯 가마니의 밀이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또 열 가마니의 쌀을 거두게 된다. 정말 ‘살암직’하다”

“일제 시대에 윤 노인은 아들 하나밖에 공부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은 모두 일어였으며 강의도 일어로 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세 손자는 모두 조선소학교에 다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선생님은 모두 조선인이며 강의도 조선어로 한다. 시대가 달라진 것이다. ‘살암직’하다”고 했다. 볼소프는 그의 말에는 거짓이 없다고 믿었다.

"주민을 굶겨 죽이고 외국인을 납치하며 정치
범 수용소를 운영하는 데다 인권을 유린하는 북
한에 들어가 하루에 600여 달러짜리 호화 관광
을 한다는 것은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이런 ‘살암직’ 현상이 불과 7개월여 만에 어떻게 변하는지를 볼소프는 보았다.

46년 11월 3일 볼소프는 북조선에 첫 번째로 실시된 인민회의 군·시·도 대의원 선거를 참관했다. 김일성이 출마한 평양시 선교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투표자들 손에 모두 물을 담은 대야와 비누, 수건이 쥐여 있었다. 한 노인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김일성 장군과 같은 분을 선거하려면 마음과 손이 모두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는 투표용지를 받아 쥐기 전에 깨끗이 씻으려고 이것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로부터 60년이 다 되어가는 2006년 5월 1일 데보라 오린 뉴욕포스트 워싱턴 지국장은 ‘하버드가 깡패를 좋아한다’는 칼럼을 썼다. 오린은 하버드대 68학번 출신이다.

”학교의 상징이 라틴어로 진실(Veritas)인 데도 불구하고 총동창회가 동문들에게 악마 같은 깡패한테 절을 하라는 게 말이 되느냐”는 질타였다.

하버드대 총동창회는 4월부터 “오는 8월 10일~10월 10일 사이에 열리는 북한의 아리랑 축제에 미국 여권을 가지고 있으면 6,360달러면 갈 수 있다”면서 방문단을 모집했다. 그리고 조건을 붙였다. “방문하면 북한지도자들에 대한 예의로 김일성동상 앞에서 절을 해야 한다”

오린 지국장은 질타를 계속했다. “주민을 굶겨 죽이고 외국인을 납치하며 정치범 수용소를 운영하는 데다 인권을 유린하는 북한에 들어가 하루에 600여 달러짜리 호화 관광을 한다는 것은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하버드대 총동창회 사무국은 “방북 신청자가 5명에 불과해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1946년과 2006년 북한의 봄은 한반도의 한 하늘 아래서 너무 다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기토비차 볼소프의 ‘우리는 조선을 다녀왔다’의 ‘살암직하우’의 길을 찾기를 바란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