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 군사회담 대변인은 지난 5월 27일 남북열차 시험운행 중지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 발표문에는 ‘그 누구’라는 책임을 질 인사에 대한 표현이 3차례, 책임을 묻는 주체인 ‘우리 군대’라는 말이 7차례 나온다.

“요즈음 남조선에는 5월 25일로 예정되었던 북남열차 시험운행이 중지된 문제를 두고 책임있는 당국자들과 여·야당 관계자들까지 앞장에 서서 ‘그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듯 요란스럽게 떠들고 있다.”

“남측은 현실을 오도하면서 모든 책임이 ‘그 누구에게’ 있는 것처럼 여론을 돌리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자기가 할 책임을 다하는 데 응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두 대목에서의 ‘그 누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지칭하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번 열차운행 중지 책임 문제를 일으킨 남측 의 ‘그 누구’도 있다.

“열차를 통한 ‘그 누구’의 평양방문이나 월드컵 응원단의 서해선(경의선의 북쪽 표현) 통과 시도, 열차수송에 의한 개성공업지구 건설의 활성화 등 남측이 지금까지 들고나왔던 이러저러한 모든 제안들은 예외없이 협력과 교류의 외피를 쓴 제나름의 정략적 기도에서 출발된 것이라는 것을 ‘우리 군대’는 간파한 지 오래다.”

이 대목의 ‘그 누구’는 오는 6월27~30일 평양을 다시 찾는 한국인 유일의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DJ) 전 대통령를 말한다. 북쪽의 ‘그 누구’를 옹호하기 위해 남쪽의 DJ는 ‘정략적 기도’자가 된 셈이다.

왜 이런 책임이 김 전 대통령에게 넘어왔을까?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분석했다. “기본적으로 남북 간 열차운행이 있다면 당연히 김 위원장이 먼저 이용해야 하는데 왜 김 전 대통령이 먼저 이용하려 하느냐는 불만일 수 있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DJ의 방북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북한의 본심이 드러난 것”이라고 해석했다. <조선일보 5월 29일자 보도>

김근식, 남성욱 두 교수의 분석과 해석에 대해 5월 25일에 시험운행이 있었다면 축사를 하려고 했던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 남측 대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심사는 어떠했을까?

백 교수는 올해 지령 40주년이 되는 ‘창작과비평’을 28세 때인 1966년 1월 15일에 창간했으며 지금 편집인으로 있다. 지난 5월 1일에는 ‘한반도식 통일, 현재 진행형’이란 책도 냈다. 1998년 ‘흔들리는 분단체제’을 낸 이후 8년 만에 쓴 사회비평서다.

미국 하버드대 문학박사, 유신 때 해직 교수, 민족문학진영의 대표적 평론가로 ‘민족문학론’ ‘분단체제론’ 등 문학계에서 80년대 사회변혁 담론 생산의 ‘대부’로 활동해 왔다.

백 교수는 ‘그 누구’라는 책임을 묻는 군인도, 정치가도, 언론인도 아니다. 문학을 연구하면서 체득한 웅숭깊은 언어로 ‘한반도 제반 문제의 근본원인이 분단체제에 있음을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 모색’한 학자이다.

이 두 대목에서의 '그 누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지칭하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번 열차운행 중지 책임 문제
를 일으킨 남측의 '그 누구'도 있다.

백 교수는 지난해 9월 11일 광복 60주년 기념 세계평화축전 도라산 강연회에서 연설했다.

“저는 여기서 통일에 대한 개념을 바꿀 것을 제창합니다. 단일형 국민국가로의 ‘완전한 통일’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 사이 어느 지점에서 남북 간의 통합작업이 일차적인 완성에 이르렀음을 쌍방이 확인했을 때 ‘1단계 통일’이 이룩되는 것이라는 새로운 발상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무엇이 통일이며 언제 통일할 거냐를 두고 다툴 것 없이 남북 간의 교류와 실질적 통합을 다각적으로 진행해 나가다가 어느 날 문득 ‘어 통일이 됐네, 우리 만나서 통일됐다고 선포해 버리세’라고 합의하면 그게 우리식 통일이라는 겁니다.”

백 교수가 ‘우리식 통일’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쓰는 말은 ‘두루뭉실’,과 ‘어물어물’, ‘통일시대’ ‘6.15시대’(이번 북측 성명에도 이 말은 나옴) 등이다. 그는 지난 2월 24일 일본 리츠메이칸 대학 코리아 연구센터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한반도의 통일시대의 한일관계’ 기조연설에서 이런 말들을 썼다.

“‘6.15시대’에도 남북을 가르는 군사 분계선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그런 의미에서 분단시대가 엄연히 지속 중임에도-이를 ‘통일시대’로 부르는 것은 단순히 통일 의지나 희망사항을 강조하는 수사법이 아닙니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일이 장기적, 점진적 과정일 뿐더러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특이한 과정이기 때문에 ‘분단시대냐 통일시대냐’라는 양분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두루뭉실’한 상태로 ‘어물어물’ 진행되는 과정이야말로 한반도식 통일의 고유한 속성이며 그 내용 자체라는 것이 나의 주장입니다.”

’두루뭉실’이란 말은 북한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편찬 ‘현대 조선말사전’에는 나와 있지 않다. 작고한 한갑수 씨가 감수한 ‘국어 대사전’에는 ‘언행 또는 성격이 또렷하지 못하다(ambiguous )’로 풀이되어 있다.

’어물어물’은 북의 사전에 ‘일이나 행동을 시원스럽게 하지 못하고 꾸물거리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북측의 ‘그 누구’인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백낙청 교수도 이번 함께 초청해 ‘두루뭉실’, 어물어물’ 통일론을 주제로 담론을 펼쳤으면 좋겠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