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9일 창랑(滄浪) 장택상 전 총리의 셋째 딸 장병혜(1932년생, 조지 워싱턴대 역사학 박사) 박사는 발끈해 말했다.

“드라마(KBS 주말극 ‘서울 1945’)가 여운형 암살의 배후에 이 전 대통령과 장택상 전 총리가 있는 것처럼 묘사했다.”

“드라마를 통해 건국의 원훈(元勳)들을 폄하하는 것은 나라의 근본을 뿌리부터 좀먹는 것이다.”

장 박사가 1969년 8월 1일 77세로 별세한 아버지에 대해 쓴 일대기 ‘상록의 자유혼’의 ‘아버지 장택상’(146쪽), ‘위기 일발의 수도청장’(16쪽)에는 드라마 ‘서울 1945’의 여러 장면이 차분히 서술되어 있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 근처에서 암살된 여운형(1886~1947)과 관련된 내용도 여러 대목이 다르다. 장택상과 여운형의 관계는 직접적인 것이 아니었다. 1938년 이승만을 돕기 위한 흥업구락부 사건이 터졌을 때 이 구락부 회계였던 여운형의 사돈인 이만규(1882~1978, 배화여중 교장, 북한에서 조통 상무위원· 조국통일사 사장 역임)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던 관계였다.

장택상은 1945년 8월 16일 칩거하고 있던 경북 칠곡에서 동아일보 김성수 사장의 ‘급히 상경’의 전보를 받고 서울로 올라와 계동의 김 사장 집을 향했다. 안국동 로터리에서 장택상은 이만규를 만났다.

“오오 창랑! 잘 만났네.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찾던 중일세. 우리 어서 몽양(여운형의 호) 댁으로 가세.” “나는 선약이 있으니 다음날 만나세.” 이것이 장택상과 이만규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갈림길이었다.

이만규는 여운형을 쫓아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 근로 인민당의 주요 직책을 맡았다가 1948년 5월 북으로 갔다. 장택상은 김성수 집에서 만난 송진우(45년 12월 암살), 장덕수(47년 12월 암살), 김준연(법무장관, 통일당 당수) 등과 함께 일하며 한민당의 외교부장에서 수도 경찰국장, 초대 외무장관, 3대 국무총리로 건국의 길에 나섰다.

장 박사의 ‘아버지 장택상’에는 이런 이데올로기적 헤어짐이 인간적 우정으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이미 지하당이 되어버린 조선인민당의 부위원장이었던 이만규에게 48년 5월에 장 경찰총장은 권유했다. “내가 내 손으로 자네를 잡아 넣을 수 없네. 자네 사상은 내가 보기에는 고칠 가망이 없어! 그렇다면 이북으로 가게. 자네도 일제 하에서 이 나라 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자야. 어서 거기 가서 자네 나름대로 살아 보게.” ‘아버지 장택상’에는 이만규를 38선까지 특별 호송했다고 쓰여 있다. “이만규, 회유할래야 할 수 없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있었다”는 표현도 했다.

그러나 장택상의 여운형에 대한 이만규를 통한
'우정'은 여운형 가족에게는 이해될 수 없었다.

그러나 장택상의 이런 ‘인간적 우정’은 이데올로기의 적(敵)이었다. 1947년 피난 직전인 7월께였다. 장 경찰청장을 만나본 미 군정청의 고문인 고경흠이 여운형을 찾았다. 그의 옆에는 이만규가 있었다.

“장택상을 방금 만나고 오는데 요즘 공산당과 한민당, 한독당에서 모두 몽양을 해치려는 조짐이 보이니 지체말고 당분간 은거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더라.”

여운형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장택상에게 가서 날 생각해줘서 고맙다고 전하게나.”

이만규가 그에게 절절하게 당부했다. “몽양, 너무 고집 부리지 말게. 이 한 달 동안에도 테러가 여러 번 있지 않았나. 그동안 하늘이 도와서 무고했지만 정말 장담할 수가 없네. 당분간 몸을 피하게.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살아야 할게 아닌가.”

여운형이 흔연히 대답했다. “언젠가 김일성 위원장이 나에게 한 말이 생각 나누만. ‘목숨을 쉬이 내던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혁명을 하되 죽는 날까지 살아서 해야 한다. 죽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 아버지 유언이다’라고 했지. 나를 아껴주는 그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나. 나도 이 북새통을 떠나 시골에 가서 조용히 머리쉼이나 하면 좋겠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가 통일이냐, 분열이냐 갈림길에 섰는데 어찌 제 한 목숨 부지할 생각만 하겠나. 근심말게. 난 죽지 않아.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났는데 해방된 제 땅에서 그렇게 쉬이 죽을 텐가···.”

여운형의 피신을 확인하려는 듯 며칠 후 장택상은 정복 차림으로 그의 집을 찾았다. “사모님! 요즘 여 선생이 어디 가 계시죠.”

“그거야 당신들이 더 잘 알지 않소?” 하며 여운형의 아내가 답했다.

“아, 나는 선생의 신상이 걱정되어 그럽니다. 요즈음 입수한 소식에 의하면 테러하겠다는 패가 어찌나 많은지···. 오늘이라도 선생이 들어오시면 한동안 시골에라도 은거하라고 전하십시오.”

그러나 장택상의 여운형에 대한 이만규를 통한 ‘우정’은 여운형 가족에게는 이해될 수 없었다. 장택상이 여운형이 숨진 서울대 병원을 조문 왔을 때 큰딸 남구는 칼날 같은 소리를 질렀다. “우리 아버지를 죽인 자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나타났는가? 어서 썩 나가라.”

장택상은 아무 말없이 돌아서 나왔다.

이 이야기들은 여운형의 둘째 딸 여연구(1927~1996) 북한 조국전선 공동의장이 91년 서울 정릉 태봉에 있는 아버지 묘소를 찾은 후 쓴 ‘나의 아버지 여운형’(2001년 서울서 나옴)에 나오는 대목이다.

KBS의 드라마 ‘서울 1945’의 작가, PD들은 1945~47년 사이의 여운형과 장택상을 알기 위해서 꼭 두 책을 읽기를 바란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