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의 8월 21~24일 일정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

8월 21일에는 중앙 외사공작회의, 정치국 상무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평등사회 실현을 위해 내걸었던 ‘조화사회 건설’ 대신 ‘조화세계(중국어로 화해(和諧)사회) 건설’이라는 새로운 대외전략을 내놨다. ‘조화세계’는 “세계의 중국위협론에 대응하는 한편, 능동적으로 세계질서 구축에 나서 미국의 일방주의, 패권주의에 제동을 걸겠다”는 것으로 많은 중국 전문가들이 해석했다.

8월 24일에는 베트남 농득마인 공산당 서기장과 만나 통킹만 석유자원 공동개발 추진 등을 합의했다. 이날 후 주석은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과도 회담했다. 현재 한 달 15만 배럴의 대중국 원유판매량을 연말까지 20만 배럴로 늘리고 2009년에는 50만 배럴까지 확대키로 했다. 후 주석은 베네수엘라의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에 지지를 표명했다.

홍콩의 월간지 ‘동향(動向)’에는 7월 26~28일 사이 휴양지 베이허(北河)에서 열린 전×현직 중국 지도자 회의(후 주석, 장쩌민 전 주석, 리펑 전 총리, 주룽지 전 총리 등 지도자 참석)에서 전×현직 주석측이 충돌했다고 보도했다. 한국일보 이영섭 베이징특파원은 “장쩌민의 정치기반을 와해하고 장쩌민 시대를 ‘역사’로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해석했다.

이제 집권 3년을 향해가는 후 주석의 중국은 어떤 진로를 택할까? 대답은 워싱턴포스트의 베이징 지국장을 지냈던 존 폼프레트(현재 L×A 지국장, 1959년생)가 8월 8일 펴낸 ‘중국 학습(Chinese Lessons)-5명의 학우와 새로운 중국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폼프레트는 뉴욕타임스 기자였던 아버지의 만류에도 스탠포드 대학 3학년 때 개방을 시작한 중국에 첫 미국 유학생을 자원했다. 1981년에는 난징대학 역사학부에 편입하여 82년에 졸업했다. 이때 그는 63명의 역사학부 친구를 사귀게 됐고 특히 기숙사 방을 같이 쓰던 7명과는 일기를 서로 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중국과 세계의 역사를 논하는 학우가 됐다.

그는 1989년 천안문 ‘혁명’(그는 ‘혁명’이라 표현)이 발생했을 때 AP특파원이었다. 그해 7월에는 ‘사태를 왜곡 표현’했다는 이유로 추방됐다. 워싱턴포스트 특파원으로 96년에 베이징에 다시 갔다.

그의 난징대 역사학부 ‘82학번’ 학우는 모두 1950~60년생으로 56년부터 76년까지 진행된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을 10대에서 20대에 걸쳐 겪은 세대였다. 그의 ‘중국 학습’에 자주 등장하는 주리안춘(별명 ‘책벌레 주’)은 2005년 4월 청명절에 그을 데리고 자신의 조상을 참배했다.

56년 문화혁명 때 동네 할머니를 ‘자본주의자’라고 뺨 때려 죽인 경험이 있는 ‘책벌레 주’. 그는 졸업 후 공산당원이 되기 싫어 탱크 부대에 장교로 입대하고 마르크스주의 교관이 된다. 그 후 그는 현대화 물결에 휩쓸려 소변에서 혈전 용해효소를 분해하는 회사의 경영 파트너가 된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역사학도였다.

‘책벌레 주’는 폼프레트에게 마오쩌둥과 진행 중인 중국의 현대화에 대해 속내를 터놓았다. “마오는 자본주의를 능가하는 경제세력(공산주의)의 대표인가? 아니다. 그럼 그는 진보주의자인가. 아니다. 그는 중국에서 가장 미개한 세력의 대표자였다. 그는 노동자를 대표하지도 않았다. 그는 암살자들을 대표한다. 그가 한 것은 공산주의 혁명이 아니었다. 그건 암살자들의 혁명이며 그게 우리의 진실된 역사다.”

폼프레트는 2003년에는 다른 학우인 난징 교원대학 역사학부 주임인 우시아오칭(1957년생)으로부터 ‘문혁’에 대해 고등학교 교과서를 쓴 내력을 들었다. ‘늙은 우’로 불렸던 그는 ‘문혁’ 때 교원대학의 1세대 공산주의자였고 학과장이었던 아버지는 ‘수정주의자’로 지목되어 죽었다.

‘늙은 우’는 고백하듯 말했다. “중국은 무어라 빗대어 말할 수 없는 사회다. ▲중국 공산당은 자본주의자다 ▲옛 중국이란 과거는 매몰돼야 한다 ▲노동자의 낙원이란 말은 착취라는 말과 같다 ▲그의 아버지의 순국처럼 애국자들의 공정은 훼손되었다 등 중국의 모순과 부조화를 역사책에서는 쓸 수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빗대어 쓸 수 있나?”

폼프레트는 그가 결국 진실에 가깝지 않은 책을 냈고 교수직을 지켰왔음을 봤다. 자신이 중국을 떠날 쯤인 2004년 5월, 운전면허를 따려는 현대화를 좇는 ‘늙은 우’를 본 폼프레트는 마음이 아팠다. “‘늙은이 우’는 편의 때문에 다시 한번 원칙, 진리를 잃어버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폼프레트는 99년 12월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 출신으로 하버드대 MBA를 딴 장메이와 결혼했다. 신부와의 나이 차이는 열두 살이나 됐다. 그에게 중국은 또 하나의 반쪽 조국이 된 것이다.

그는 결론 내리고 있다. “80년에 중국에 왔을 때 국민소득은 300달러였다. 그때 인민들은 당과 정부, 교수와 학생, 서로 간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개방으로 밀어닥친 정보로 인해 중국의 공산당은 서서히 변했지만 사회는 급격히 변했다.”

“그러나 공포는 자유체제로 대치되지 않았다. 사회는 안정 없이 불안하게 나아갔다. 중국말로 ‘푸자오(fujao, 기회, 행운이 간질거리게 엷게 깔린 불안)’ 상태다. 많은 학우들이 미래를 걱정한다. 물론 미래가 있다는 학우도 있지만.”

존 폼프레트의 책에는 진실이, 중국을 향한 따뜻한 시각이 실명 소설처럼 아름답게 담겨 있다.

후 주석은 꼭 이 책을 읽고 ‘조화세계’의 길을 찾기를 바란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