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근거가 되는 곳을 ‘주소’라 한다. 민법 제18조 제1항에 있는 말이다. 주소는 인간이 살아가는 근거지가 되므로 우리는 그 이름을 좋게 지으려고 애쓴다. 길 이름, 마을 이름, 건물 이름도 이왕이면 발음하기 좋고 뜻도 좋은 쪽으로 지으려고 고심한다.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장기 사업으로 ‘도로명 새 주소 부여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름을 새로 지을 때에는 그곳 또는 주변의 특성이나 지형,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기도 하고 그 지역과 인연 있는 인물의 이름을 따기도 한다. 출판사가 모인 마포구의 ‘글마을길’, 시내버스 차고지가 있는 양천구의 ‘새시작길’이 그곳에서 하는 일을 알려 주고, 삼청동의 ‘돌층계길’이 그곳 지형을 보여 준다.

동식물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양재1동의 ‘난초길’, 사당동의 ‘배나무길’, 대방동의 ‘능금길’, 성북동의 ‘꿩의 바닷길’이 그 예다. 정동의 ‘덕수궁길’, 인천 중구의 ‘제물포조약길’은 역사적 사실과 관련 지었고, 한강로 삼각지의 ‘배호길’, 성북구의 ‘이태준길’, 경북 안동의 ‘퇴계 오솔길’은 그곳과 인연 있는 인물의 이름을 땄다.

행정자치부는 전국 읍·면은 물론·동·리 단위에 이르기까지 지역·마을 이름을 조사해 문제가 있는 백여 군데를 찾아 연말까지 모두 고칠 계획이라고 지난달에 밝혔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민족성을 부정할 목적으로 지명·한자 표기를 바꾸었거나 어감이 좋지 않아 주민이 꺼리는 행정구역이 주요 대상이다.

‘임금 왕(王)’이 ‘성할 왕(旺)’으로 바뀐 강릉시 ‘왕산면’, 오로지 방향만 표시된 ‘동면(東面)’·‘남면(南面)’, 어감이 좋지 않은 광주광역시 ‘쌍촌동’·여주군 ‘하품리’·춘천시 ‘통곡리’·보은군 ‘상판리’가 그 예다.

한편 서울 ‘마장동’은 도축장을, ‘봉천동’과 ‘신림동’은 달동네를, 경기도 ‘동두천시’는 기지촌을 연상케 한다며 주민들이 이름을 고쳐 달라고 신청하기도 했다.

건물 이름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세종로의 정부종합청사(1970)는 정부과천청사·정부대전청사가 준공되면서 ‘정부세종로청사’(1997)를 거쳐 ‘정부중앙청사’(1999)로 바꾸었고, 국립극장의 대극장·소극장은 6년 전에 ‘해오름극장’·‘달오름극장’으로 바꾸었다. 7년 전에는 세종문화회관을 ‘세종센터’로 고치려다 논란 끝에 그만두었다.

건물이 아파트인 경우, 분양하거나 입주하는 사람은 아파트 이름이 고급 아파트로 인식되게 하려고 무척 고심한다. 아파트 주변 환경이나 여건에 새 부가가치가 생기지 않았는데도 이름 하나 바꿔 아파트 값을 올렸다는 얘기도 들린다.

위의 새로 붙인 이름을 보면 종래의 무겁고 딱딱한 한자어에서 벗어나 될 수 있으면 예쁘고 정겨운 우리 고유어로 지으려고 애쓴 흔적이 뚜렷하다. 고유어 사랑을 이름 짓기에서 실천한 셈이다.

주소를 마음대로 만들 수도 있다. 매일 요긴하게 쓰는 전자우편 주소다.

한국인의 217건을 모아 연구한 이복규 교수에 따르면 이 주소는 의미 면에서 유의미형(有意味型 96%)이 무의미형(4%)보다, 입력 방식 면에서 정상 입력형(97%)이 비정상 입력형(3%)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비정상 입력형’이란 자판은 영어 자판으로 해놓고 한국어를 입력한 것을 말하는데 알고 보면 이것도 자신의 소망이나 취향을 드러낸 것이 대부분이다.

구조 면에서는 단순형(62%)과 확장형(38%)으로 나뉜다. ‘단순형’이란 사는 지역, 신원, 희망, 소유물, 좋아하는 것, 이름 등 어느 한 요소만 취한 것을, ‘확장형’이란 자기 이름에다 숫자나 다른 요소를 곁들인 것을 이른다. 조사자에 따라 주소의 유형과 그 비율이 차이 나겠지만 자신의 소망이나 기호를 담아 주소를 만들려는 마음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길, 마을, 건물, 전자우편 주소에서 웬만한 이름을 얻었으면 이제는 그 이름을 뒷받침하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어디에서 살든 무릎을 움직일 공간만 있으면 문제될 것이 없고 그곳을 깨끗하게 쓸고 닦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여기며 살던 우리 선조들…. 그분들의 느긋한 마음 씀씀이를 한번쯤 닮아 볼 만도 하지 않을까.


김희진 국립국어원 국어진흥부장 hijin@mct.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