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다. 조선 국왕 선조는 원군으로 오게 된 명나라 장수에게 중국풍수사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한다. 이때 들어온 중국풍수사들은 선조의 궁색함을 최대한 악용, 재물만 탐하고 행패를 부리며 도참설에 의한 이기론(理氣論) 풍수만 과시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중국풍수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 우리나라의 지형에 맞지않는 이기론풍수가 왕궁, 사대부, 일반 백성에까지 광범위하게 유행했다. 그리고 묘지풍수, 술수풍수, 미신풍수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쩌면 조선 초 개국 수도를 한양에 정할 때 우리 고유풍수를 앞세운 무학대사가 중국풍수에 근거한 정도전에 밀릴 때부터 단초가 됐는지 모른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조선 500년 역사에서 본부인의 적통 왕손이 드물고 성종 이후 사화(士禍)가 빈발하고 민란이 발생한 것이 오도된 중국풍수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나아가 중국 풍수는 평야지대에서 생활한 한족(漢族)의 산물인 반면, 우리 고유풍수는 산악지대가 많은 동이족(東夷族)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석묘, 장군총 등이 동이문화지대에서만 발견되는 것과도 관련 있다고 한다. 풍수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막을 유용한 무기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러한 풍수의 역사성에 비하면 요즘 풍수는 아주 세속화되고 가벼워졌다. 때로 권력과 부를 가르는 준거로 위엄을 과시하지만 이내 거품처럼 사라진다.

우리 풍수는 본래 사람과 자연의 조화에서 출발한다. 현대 지리학이나 서구 문명론에서처럼 단순한 토지나 자원의 제공처가 아니다. 능동적으로 움직여 인간과 감응하는 활동체다. 요즘 환경이니 웰빙이니 하는 친자연적인 아이콘들은 본래 우리 풍수의 요소들이다. 그만큼 풍수에 인간적 가치들이 내재돼 있다는 말이다.

역사에서 가장 큰 과오는 ‘망각’이라고 한다. 왜곡된 중국풍수를 맹목적으로 믿기보다는 우리 풍수의 원형과 정신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박종진 차장 jjpark@j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