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전 국무총리의 1월 16일 대선 불출마 선언을 예측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더욱 그의 불출마를 촉진시키려고 한 발언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건 전 총리의 서울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동기생(56년 입학)인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은 2006년 12월 송년 모임에서 말했다. <“국무총리까지는 누가 시켜주지만 대통령은 스스로 되는 것이다.”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씨가 다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고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둑 심보’다. 정권을 건 싸움에 공짜는 없다.”>

류 전 주필이 ‘목숨 걸고 싸우라’는 것은 2007년 대통령 지망자는 북한 김정일 정권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 말이다.

고 전 총리의 경기고와 서울대 문리대(외교학과) 후배인 민주당 신중식 의원은 1월 2일 신년 여론조사에서 대선 후보로 3등을 달리는 그를 찾았다. 그의 캠프의 참모이기도 했던 신 의원이 말했다. “반전의 기회가 있으니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국면을 돌파해야 합니다.”

고 전 총리는 '행정의 달인'에서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지내며 '국정의 달인'이 되었다. 죽어도 다시 태어나는 삶이 있다. 그는 이번에는 대통령되기보다 만들기에 나섰으면 좋겠다.

고 전 총리는 답변했다. “사즉사(死卽死)도 방법이다.” 대선 불출마의 뜻을 직감토록 했다.

고 전 총리가 고문으로 있는 다산연구소의 이사이며 캠프 내 최측근으로 널리 알려진 김용정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도 연말에 불출마의 뜻을 알고 설득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고 전 총리가 불출마의 뜻을 1월 14일에 정한 것으로 전했다. 김 전 편집국장은 오마이뉴스와의 1월 17일 인터뷰에서 말했다.

<“빨리 결정을 내린 것은 역시 고건답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설사 대선에서 진다 하더라도 새 정치의 패러다임을 만들겠다는 절박감, 각오가 있다면 지지율 저하가 무슨 이유가 되겠는가. (지지율) 1% 후보들도 버티고 있지 않나. 결국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우선 설득의 리더십이다. 현실정치에 좌고우면하면서 ‘정치인들이 날 이용하려고만 한다’는 푸념은 자기 위로밖에 안 된다.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을 견인하려면 비전과 논리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과감하게 행동해 자신의 뜻을 대세로 이끄는 게 정치인의 덕목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낀 것 같다. 리더십의 부재와 함께 온몸을 던지겠다는 ‘사즉생’의 각오가 부족했다.”>

김 전 편집국장도 대선 지망자는 ‘사즉생’의 정신이 있어야 함을 앞서 든 류근일 전 주필, 신중식 의원과 함께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또 ‘죽음’을 들먹이며 고 전 총리를 설득했다. “꼭 대통령이 되어야만 하느냐. ‘장렬한 전사’, ‘아름다운 패배’도 의미가 있지 않느냐”

고 전 총리는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제3후보나 선거용 정당 설립의 전철을 결과적으로 초래해선 안 된다”는 말로 불출마를 굳혔다.

고 전 총리는 16일 불출마의 변을 냈다. <“그동안 늦지 않은 시기에 내 거취를 결정하겠다고 누차 말했는데 대선의 해를 여는 새해 첫 달, 지금이 적절한 시점이다.” “더 훌륭한 분이 나라의 희망을 찾아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마이뉴스에 컬럼 ‘정치 톺아보기’을 쓰는 김당 기자는 결론 내렸다.

<현실에서 고 전 총리처럼 기존 정당의 벽이 높아 현실정치의 한계를 느낀 정치인은 많았으나 그처럼 우리나라 선거 정치사에 있어서 제3후보가 ‘선거용 정당’ 설립의 전철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불출마를 선언한 유력한 여권 후보는 없었다.

그의 깨끗한 결단은 ‘모든 것을 다 거는 대선판’에서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끝까지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기성 정치인과는 확실히 다른 그만의 미덕이다.>

고 전 총리의 불출마에 대해 네 사람의 분석, 해석, 인식을 보면서 필자는 나름대로 느낌이 생겼다.

필자가 1959년 재수해서 서울 문리과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했을 때 그는 학생회장이었다. 그때 문리대 캠퍼스에서의 화제는 그해 말에 있을 차기 학생회장 선거에 ‘고건 수첩’을 누가 갖게 되는가가 화제였다.

경기고라는 큰 학당(學堂)을 가지고도 고건은 1,600여 명의 학생 리스트를 만들어 그 등급을 매기고 특성을 표시했다. 무협지에 나오는 비급 같은 이 수첩은 경기고 출신 영문과 학생 P씨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P씨는 당선됐다.

후에 고 전 총리는 ‘행정의 달인’에서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지내면서 ‘국정의 달인’이 되었다. 늘 그를 볼 때마다 1959년의 ‘고건 수첩’이 떠오른다. 물론 그 수첩에는 ‘사즉생’, ‘사즉사’라는 메모는 없었다. 학생회장이 꼭 되고픈 열망이 투표자들을 차분하게 분석해 적혀 있을 뿐이다.

죽어도 다시 태어나는 삶이 있다고 한다. 고 전 총리는 ‘59년 수첩’을 정리했듯이 이번에는 대통령되기보다 만들기에 나섰으면 좋겠다. 59년의 ‘처음으로’의 마음으로 ‘대통령 만들기’라는 새 정치를 하기를 바란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