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1일은 한국일보 창간 발행인 고(故) 백상 장기영 사주의 30주기 추모의 날이다.

필자(1939년생, 한국일보 견습 17기, 64년 12월 입사)는 공식 추모 행사가 시작되기 전인 오전 10시께 추모의 화환을 올리고 절했다. <주간한국 ‘어제와 오늘’ 필자 朴湧培. 77년 한국일보 편집국장 故 金昌悅>이란 이름이 달린 조화였다.

이어 공식 추모행사가 열릴 때 참석한 ‘장명수 칼럼(장칼)’의 필자 장명수(1942년생, 견습 16기, 63년 12월 입사) 전 한국일보 사장이 이 조화를 보고 말했다고 들었다.

“고인이 돌아가신 이에게 꽃을 바치는 것은 좀 이상하다”

필자는 조화를 바치며 행사를 준비하던 한 간부 직원에게 부탁했다. “누가 돌아가신 김창열 국장 이름이 왜 나왔냐고 물으면, 김 국장이 꿈에 필자를 찾아와 꼭 꽃다발을 올리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설명해주세요.”

4월 12일자 한국일보 사회면에 실린 추모행사 기사에 한국일보 사장을 지낸 여러 선배들 이름이 나왔다. 그러나 신문의 중추인 전·현직 편집국장들의 이름이 없었다.

이번 30주기에 참석하지 못한, 이 세상을 떠났기에 참석 못한 이들이 떠올랐다. 첫 번째가 77년 사주가 돌아가셨을 때 편집국장을 맡았던 김창열(1934년생, 견습 7기, 58년 4월 입사) 전 한국일보 사장은 2006년 6월 7일 고인이 됐다.

두 번째로 사주가 계신 저 세상으로 떠나간 이는 정달영(1939년생, 견습 13기, 62년 3월 입사) 전 주필은 77년 4월에 사회부 부장대우 기자였다. 그는 2006년 8월 26일 고인이 됐다. 90년에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세 번째가 86년 편집국장이었던 이문희(1936년생, 견습 11기, 60년 3월 입사) 전 주필이었다. 그는 2005년 2월 1일 이 세상을 떠났다.

세 분은 모두 한국일보 편집국장과 주필을 지냈다. 이문희, 정달영 국장은 필자의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김 전 국장만이 나를 찾아온 것은 왜일까? 80년 9월께로 기억된다. 그때 논설위원이었던 김 전 국장은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에 유학 중이었고 필자도 그때 그곳에 갔다. 둘이서 뉴욕의 허드슨 강 건너편에 있는 조망대에서 뉴욕시를 바라보며 나눈 대화다.

“사주가 지금 살아계셨으면 어떠했을까요?”라는 질문에 김 전 국장은 한참을 생각하다 말했다.

“가만 계시지 않았을 게야. 군인들도 만나고, 정치인도 만나고, 굉장했을 거야.” “사주가 왜 75년에 김 선배를 편집국장으로 발탁했습니까? 많은 다른 선배도 있었는데…”

“마음대로 다루기에는 좀 버겁고, 또 자기를 존경하는 것 같고, 그리고 젊은 기자들이 잘 따르고…. 사실 나는 ‘왕초’(우린 사주를 그렇게 불렀다)를 존경해.”

필자는 그때 한마디 했다. “이원홍 국장(1929년생, 견습 4기, 56년 4월 입사, 71~74년 편집국장, 85년 문공부장관)은 사주가 헬리콥터에서 내리기도 전에 뛰어가는 형이라면, 김 국장은 한참 생각하다 역시 뛰어가는 것 같습디다.”

김 전 국장은 두꺼운 안경 속에서 한참을 생각하다 부엉이처럼 말했다. “나는 ‘왕초’를 꽤 괜찮은 분으로 봐. 뛰어가야지.”

30주기 추모행사에 참석한 ‘현해탄을 알고 있다’의 작가 한운사(1923년생, 54년 창간 직후 천관우 논설위원 추천으로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문화부장 지냄) 옹은 2006년 10월 <뛰면서 생각하라>를 냈다. 92년 고 백상 장기영 일대기 <끝없는 前進>를 낸 후 두 번째다.

623쪽의 이 책은 저자가 83세의 노옹이라는 면을 떠나 읽으면 너무나 발랄한 20대의 필치다.

이 책에는 550여 명의 인사가 나온다. 그러나 앞서 말한 김창열 전 국장은 한 번. 이문희, 정달영 전 국장은 한 차례의 언급도 없다.

일제시대(1916년~45년) - 한국일보 창간(54년 6월) - 부총리 시절(63년~67년) – 한국일보 복귀 (68~77년) 시기 중 1916~68년이 책의 중심 내용이기 때문이다.

한운사 옹이 말하려는 여러 가지 중 기억할 만한 대목이 몇 군데 있다.

<65년 1월 25일,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짜고 있는 장기영 부총리실에 최성렬 공보관이 신문을 들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처칠이 죽었습니다!”

“언제?”

“어제 1월 24일 죽었습니다.”

“이왕이면 ‘돌아가셨습니다’하라구. 20세기를 풍미한 대정치가 아닌가?”

“예…”

그는 신문을 펼쳤다. 하나도 귀여운 데가 없으면서도 하나도 미운 데가 없는 커다란 얼굴. 무뚝뚝하지만 의지에 차 지혜가 번뜩이고, 도무지 작은 데가 없는 커다란 정치가. 그에게도 인생의 끝이 있었는가. 그도 생명만은 마음대로 하지 못했는가?

‘기사를 다 읽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그는 시가를 꺼내고 불을 붙였다. 깊숙이 소파에 몸을 누인 그는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한운사 옹은 장기영 부총리를 처칠 경으로 형상화했다. 만약 작가 한운사가 두 사람보다 몸집은 작지만 안경 낀 김창열 전 국장을 묘사했다면 안경 낀 ‘작은 백상’, ‘작은 처칠’로 그리지 않았을까.

한국일보에서 아직도 일하는 1954년 전후에 태어난 사우 기자들은, 논객들은 한운사 옹의 다음의 말을 꼭 새겨들어야 한다.

<“그런데 어쩌자고 지금 나라꼴이 이 지경이란 말인가.”

“이놈들아, 정신차려!”

그의 걸걸한 호통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질풍노도로 달린 사나이, 불도저 백상 장기영!

오늘 그가 그립다.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


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