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생성, 발전해 왔고, 궁극적으로 인류의 평화와 안정, 구원을 추구하는 공통점을 가진다. 여기에서 여러 종교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천재교육, 고등학교 사회

중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 중 한 명이 시한부 종말론에 심취해 있었다. 성격도 쾌활하고, 공부도 썩 잘하던 친구였는데 종말론을 접하면서 등교도 뜸해지고, 학교에 나와도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나는 그 친구를 보면서 ‘정말 종말이 올까?’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완벽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세상이 한순간에 종말을 맞을거라고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마음의 동요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 몇은 교실 뒤에다 장난스레 ‘휴거 D-OO일’이라고 써놓고 아침마다 숫자를 하나씩 지우는 걸 소일거리 삼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휴거(携擧)는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말부터 퍼지기 시작한 ‘시한부 종말론’은 이른바 ‘다미선교회’의 등장 이후 ‘1992년 10월 28일 휴거’로 구체화되었고, 종말론을 신봉하는 집단들에 의해 ‘세계 종말 전쟁’으로 명명된 걸프전(1991년)을 계기로 한국 사회 전체로 확산되며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만들어냈다.

결국 어이없는 한밤의 해프닝으로 끝나버린 이 사건은 종교와 사회가 끊임없이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

한국 기독교는 급속한 도시화·산업화 추세와 맞물려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2007 부활절 연합예배. 신상순 기자

사람들은 흔히 종교는 개인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술자리에서도 종교 문제를 화두로 꺼내는 것은 거의 금기시되어 있다. 남이야 뭘 믿든 말든 그건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종교는 단지 개인적 신앙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한 번 생각해 보자.

한국은 종교의 천국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한다. 왜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종교적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에서는 외국과 같은 극단적 형태의 근본주의나 종교간 과격한 투쟁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이처럼 다양한 종교인들이 공존하는 한국 사회가 다른 사회와 구별되는 점은 무엇일까?

미국 대도시의 지하철과는 달리, 새벽 1시에 혼자 지하철을 이용해도 그다지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들도 혹시 엄청나게 많은 종교인들의 수와 관련된 것은 아닐까? 한국인의 의식에 중요한 지침을 제공하는 유교는 종교일까 아닐까? 궁극적으로 한국의 종교는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까?

종교는 개인에게 우주에 대한, 세계에 대한, 사회에 대한, 인간에 대한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이해와 행동 지침을 제공하기 때문에 개인과 사회에 분명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단지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시각들 때문에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종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논술 시험에서도 종교와 사회의 관계를 다루는 문제는 거의 출제되지 않았다. 아마도 주제의 민감성 때문일 거다. 종교와 사회의 관계를 주제로 문제를 출제하려면 필연적으로 종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제시문들도 포함되어야 할 텐데, 행여 특정 종교를 비판하는 제시문을 선택했다가는 뒷감당이 문제다.

어느 교수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문제를 출제하겠는가? 그러나 달리 말하면, 종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한국에서는 언젠가 반드시 출제되어야만 하는 주제 중 하나다. 그러니 한번 살펴보자.

종교 운동이 사회 개혁 운동과 맞물렸던 사례들을 제외한다면, 종교는 기본적으로 체제유지적이며, 보수적이다. 탈속적 종교는 신도들에게 세속 정치에 지나친 관심을 갖지 말고 성스러운 일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한다.

성사(聖事)에 관심을 가질수록 구원은 가까워진다. 뿐만 아니라 종교는 현세의 부조리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어차피 차안(此岸)은 껍데기일 뿐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현세의 부조리를 해소할 수 없다는 패배적 믿음과 궁극적 행복을 보장해주는 피안(彼岸)이 존재한다는 플라톤적 사고방식은 모든 종교의 근간을 이룬다.

이러한 가르침을 약간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힘들어도 버텨!”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갈파했던 것도 종교의 이런 성격 때문이다.

물론 어떤 시기에는 종교가 사회 개혁 운동과 궤를 같이 하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특히 평등주의에 기반한 종교들은 신분사회에 환멸을 느끼던 사람들에게 사회 운동의 이론적 틀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종교는 그 자체로 사회 개혁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종교가 사회 개혁적인 성격을 띠게 될 때는 언제나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세력들이 존재했다. ‘동학농민운동’, ‘태평천국의 난’, ‘황건의 난’ 등은 모두 종교적 이념에 바탕을 둔 사회개혁 운동이었지만 이들이 단순한 종교 운동이었다면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 무속과 불교, 유교로 대변되던 한국 사회의 종교 전통은 기독교의 유입과 함께 커다란 지각변동을 맞게 되었다. 종교로서의 유교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다면, 기독교는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넓은 수용층을 형성했으며, 기복적 성격이 강하던 한국의 종교 전통과 결합하여 토착화되었다.

그러나 1960, 70년대를 거치면서 급속하게 진행된 산업화에 힘입어 한국 사회의 계층구조가 정리되면서 종교는 계층 간의 갈등을 고착화시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한국 교회는 우리 사회가 도시화·산업화되는 추세와 맞물려 급속도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내 방의 조그마한 창문 밖으로 보이는 십자가만 무려 7개다). 아마도 교회가 산업화, 근대화에 따른 정신적 박탈감을 치유하는 데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일 거다.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고향을 떠나거나 잃은 사람들이 타인들과 부대껴야 하는 도시적 상황 속에서 교회는 그들이 상실한 유대감,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 등을 다양한 조직활동을 통해 보상해주었으며, 이 때문에 한국 교회는 성공적으로 성장, 발전할 수 있었다(이러한 특성은 초기 신앙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는 개신교의 경우 더욱 두드러진다).

결국,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오늘날 한국 교회는 도시 중산층의 이해와 구미에 맞는 대형 교회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대형화는 계층 간의 갈등을 봉합하고 은폐하기도 한다. 대형화된 교회의 대부분은 지역 공간의 노른자위에 지어져 그 지역의 중산층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반면, 소득 수준이 낮은 지역에 위치한 교회의 신자는 대부분이 하층민일 수밖에 없다. 서울의 경우, 난곡 지역의 교회와 강남·압구정 일대의 교회를 비교해 보면 이같은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것은 교회의 지리적 접근성뿐만 아니라 각 교회마다 은근히 지니게 되는 계층적 성격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신도들은 각자의 계층적 소속감에 따라서 교회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즉, 교회는 유사한 계층들이 끼리끼리 모이게 되는 사교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같은 현상은 불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강남에 위치한 한 불교 포교원의 경우 신도가 되려면 입회비를 내야하는데, 놀이방·물리 치료실 등과 같은 최신식의 시설을 갖추고 신도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상대적으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은 법당 입구에만 들어가도 기가 질릴 것이 뻔하다. 이처럼 현대의 종교는 각 종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계층 질서 유지를 뒷받침하는 일종의 상징적 자본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현상 외에도 오늘날 한국 종교의 현실은 그리 밝은 편이 아니다.

각 종교들은 저마다 종교 간의 대화를 외치면서도, 초등학교의 단군상 훼손 사건이나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말했다가 구설수에 올랐던 한 정치인의 경우처럼 크고 작은 갈등을 만들어 내고 있다. 또한 오늘날 한국의 종교들은 이익집단적인 성격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스스로의 이권을 위해 타 종교와의 다툼도 불사할 뿐만 아니라 같은 종파 내에서도 이권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간혹 벌어지는 스님들 간의 난투극을 볼 때면, 소림사를 한국으로 옮겨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한국 종교는 신도 수에 비해 사회적 공신력과 통합력은 점차 감소해 가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 사회의 종교는 사회·문화적인 설득력과 견인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번 물을 수밖에 없다. 정말로 종교가 우리 사회를 구원할 수 있을까?

TOPIA 논술 아카데미 선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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