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을 빠져나갈 것

어느 작가의 사적(私的)인 정의에 따르자면, ‘좋은 사회’란 ‘빠져나갈 구멍이 많은 사회’를 말한다.

물론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이다. ‘빠져나갈 구멍’이란 표현은 왠지 뭔가 나쁜 짓을 저지르고 몰래 숨어버린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작가가 말한 빠져나갈 구멍은 ‘회피’나 ‘도망’ 따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도전’이나 ‘개척’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도전이고 개척일까. ‘개성’과 ‘창조’라는 단어가 등장해야 할 순서인 듯하다.

개성적이고 창조적인 삶 - 참으로 쉽고 명쾌하며 바람직해보이는 표현이다. 우리 모두 마땅히 지향해야 할 인생의 모토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말에 콧방귀를 뀐다든지,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든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든지, 녹녹지 않은 한숨을 내쉰다든지, 침울한 얼굴로 굳게 입을 다문다든지, 그러한 당신이라면 당신은 어떤 의미에서든 더 이상 젊지 않은 사람이다.

파란만장이나 산전수전까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인생이 한 가지 맛을 내는 음식이 아니라는 것쯤은 분명히 알고 있을 당신이다.

개성적이고 창조적인 삶이라는 지당하신 말씀이 많은 경우 어림없는 일이기까지 하다는 걸 인정하긴 싫어도 분명 눈치채고 있을 당신이다.

사회란 매우 특수한 시스템이다. 예의 시스템은 더없이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듯 보이면서도 더없이 모순되고 부조리하게 운영된다. 사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개성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적극 권장해마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사회는 우리의 개성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교묘하게 금지한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회는 ‘나쁜 사회’다.

사회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개성이나 창조가 아니다. 사회가 원하는 것은 바로 유지와 증식이다. 사회는 개성과 창조를 미끼로 우리에게서 시스템을 유지하고 증식시킬 에너지원을 뽑아간다.

물론 개성적이고 창조적인 삶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대략 ‘나름의 고유한 삶’이라 정의할 때 사회는 그 속성상 그것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다.

가령, 인터넷이나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는 것, 결혼을 하지 않는 것, 아이를 낳지 않는 것, 신용카드를 이용하지 않는 것, 신제품을 소비하지 않는 것, 저축을 하지 않는 것, 집 장만을 하지 않는 것 등등 - 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것들은 단순히 구성원 각자의 행복과 불행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이 개인의 취사선택 차원을 넘어 짐짓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그것이 곧 시스템의 유지와 증식을 가로막는 반사회적인 도발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개성과 창조를 위한 1차 조건이다. 하여 처음 언급했던 ‘빠져나갈 구멍’은 다분히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구멍이란 남다른 삶을 시도해볼 수 있는 유익한 허점인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규격화된 시스템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개성과 창조를 구현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회는 그것을 가능한 것처럼 여기게 만든다.

때깔 좋은 TV 광고 속 한 장면 같은 삶을 꿈꾸게 하는 것 - 첨단 전자제품을 사들이고, 인텔리전트 아파트에 입주하고, 최고급 세단을 굴리는 것으로 개성과 창조에 대한 막연하고 안일한 환상을 가진 구성원들의 ‘꿈은 이루어진다’. 사회는 남과 달라지는 방법을 제시하며, 우리 모두가 같아지길 기도한다.

영악하고 치밀한 시스템은 예의 빠져나갈 구멍들을 꼼꼼히 찾아 메운다.

예술가들은 흉내가 아닌 개성과 기만이 아닌 창조를 위해 끊임없이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사람들이다. 찾을 수 없다면 직접 파내서라도 그들은 늘 숨막히는 틀에서 빠져나가길 열망한다.

남들이 흔히 경험할 수 없는 모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도 한다. 운이 좋은 몇몇은 빛나는 개성과 창조의 환희를 손에 넣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히 인생을 건 위험천만한 도박이며, 지독히 고독한 피투성이 투쟁이다.

‘먹고 살기에 바빠 전쟁 치를 힘도 없을 거라는 프티 브르주아식의 재담들을 / 취소한다 난 실상 개념어들의 시산(屍山) 같은 세기의 습속에 편입되는 이상에 늘 충실하다 / 말들은 나보다 먼저 내 일생을 읽어내린다 나는 그저 그대로 흉내만 내면 되는 / 참 편한 삶을 살았다 어디로 갈 것인가? 17세기 주체성 강한 거지의 발성법으로 나는, 이제’ (강 정의 시, ‘시간아, 너 갈 데 있니?’ 중)

어디로 갈 것인가. 스물한 살에 시인이란 타이틀을 얻고 스물다섯 살에 첫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던 강 정은 1990년대 한복판에서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헤매며 그렇게 자문했다. 그의 첫 시집의 제목은 <처형극장>이었다.

‘팔다리가 묶여 있습니다 / 벗어나고 싶지 않아요 / 꿈을 꾼다는 건 얼마나 지독한 자유인가요 / 나는 이곳에서 죽으렵니다 / (…) 온몸이 묶여 있다고 생각하니 / 세상은 더 내 속에서 이글이글 끓어오르죠 / 시커먼 탈을 쓰고 내 꿈의 바깥으로 튕겨나온 / 그들이 내 발 밑에 머리를 조아려요(…)’ (‘처형극장’ 중)

이글이글 타올랐던, 그 많던 혼란과 욕망과 불안이 술과 노래와 불면으로 흩어지던 긴 시간을 지나, 강 정은 지난 겨울 10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발표했다. 그 사이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위해, 개성과 창조의 삶을 살기 위해 그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대가를 어떻게 치렀는지는 시인 자신만이 알 일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시에서 말한 대로 여전히 꿈을 꾼다는 지독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강 정은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을 지나오며 시와 음악을 비롯 다양한 장르에 발을 들여놓았고, 문화예술 관련 독특한 시점과 목소리를 가진 저술가로도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두 번째 시집에서도 첫 번째 시집과 마찬가지로 강 정 특유의 거칠고 들끓는 이미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10년 전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모든 작가들이 그러하겠지만 과잉된 자의식은 20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나의 중요한 화두다. 그러나 이제 자의식이 과잉이라는 자의식에서는 좀 자유로워진 것 같다.

자의식이 과잉이냐 아니냐를 떠나, 자의식 자체를 전보다 훨씬 유연하게 다룰 줄 알게 되었다는 것. 가까운 지인들의 눈을 통해 나를 바라보듯이 내 자의식을 좀 더 열린 태도로 대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 나이가 들어가며 알게 된 반가운 변화다.”

에너지의 절댓값은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변화는 어떤 타협이나 몰락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그의 이번 시집에는 유독 ‘다시 낳는다’거나, ‘다시 태어난다’는 이미지가 자주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녀가 잠들기를 기다려 나는 그녀의 아이를 내 속에서 꺼내도록 한다’, ‘우는 아이만 보면 엄마를 낳고 싶어’, ‘마침내 우는 아이를 내 몸에 다시 넣어 / 기어이 우는 아이가 내 몸을 찢고 다시 태어나기를’, ‘태양이 남자를 낳았으니 이제 여자가 태양을 낳을 차례’, ‘어미의 눈을 찔러 절 다시 낳아달라고 소리치는 그를 대신해’, ‘내 몸이 온통 당신으로 젖어 불타는 이 순간, / 당신은 나를 먹고 세상을 토하는 / 지상에서 유일한 불꽃벌레’, ‘그녀들이 곧 날 다시 낳을 것이다’

계절은 ‘아직’ 봄 같기도 했고, 벌써 ‘여름’ 같기도 했다. 비슷한 연배의 시인과 소설가는 각기 다른 기억을 떠올리며 덕수궁의 돌담길을 함께 걸었다. 그러나 결국 비슷한 기억일 거란 생각도 함께 한 것 같다. 비가 내린 직후였고 주변의 많은 것들이 짐짓 선명하게 느껴졌다. 뜨거운 커피를 마실까 하던 시인은 얼음이 가득 한 아이스 자스민티를 주문했다.

“완전히 불안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더 멋지게, 더 값지게 불안해하고 싶다. 나는 내가 어색해할 때의 내 표정을 알고 있다. 그런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살고 싶진 않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소설가의 질문에 답한 시인의 말이었다.

“좋은 시란 게 뭔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히, 쓸 때는 안다. 쓰고 있을 때 이건 분명 좋은 시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또 쓰고 나면 잊어버린다. 쓰고 있을 때만 알 수 있다는 게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된다.”

소설가가 아무 것도 묻지 않았음에도 들려준 시인의 말이었다.

구멍처럼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은 없다. 구멍의 입구는 늘 좁고 수상쩍고 어두컴컴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구멍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도 없다. 아무튼 용감하게, 살짝 무모하게 구멍은 빠져나가고 볼 일이다.

시인이 확실히 입막음을 부탁한 것 같지 않아 밝히건대, 강 정은 얼마 전 한 사진작가에게 누드모델을 서주었다고 했다. 직접 사진을 찾아볼 생각은 없지만 그가 용케 빠져나갈 구멍을 잘도 찾아내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 시인 강 정 >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나 추계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처형극장>,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이 있으며, 문화비평집 <루트와 코드>, <강 정의 나쁜 취향>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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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 이신조 zovenba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