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의 세 층위

자아의 형성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외부 세계에서 자기의 내면 세계에까지 관심을 돌리게 되는 청년기에 이르면 많은 회의와 갈등을 겪으면서 점차로 성숙된 인격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자아 발견은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부단히 높은 단계의 자아의 자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근원적 자아의 자각을 표방하게 된다. 이것이 철학적 물음의 실마리인 동시에 한평생을 두고 추구하는 최종적 목적이 되기도 한다.

-대한교과서, 고등학교 철학

정체성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려고 할 때 우리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나’에 대한 수많은 관념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정체성은 단지 자신의 정체(남성, 학원강사, 기타리스트, 장남 등)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도 관련된다.

즉, 정체성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자기 관념’이자, 동시에 우리를 사회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스스로 ‘남성’이라는 자기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사회를 살아가면서 남성으로서 행동하고 또 그렇게 하도록 규정된다. 그러므로 정체성이란 개인과 사회를 연결시켜주는 일종의 고리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서는 정체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위한 예비 단계로, 먼저 정체성을 개별성, 다양성, 동일성이라는 세 차원에서 살펴볼 것이다.

먼저 ‘개별성’은 세계 속에 ‘나’라는 존재는 오직 하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나의 ‘유일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속에서 ‘나’와 동일한 존재는 오직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은 개인의 법적 권리를 규정하고 행위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나를 유전적으로 복제한 존재와 나의 관계는 정체성의 ‘개별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우리가 유전적으로 동일한 일란성 쌍둥이를 각각 독립적 인격으로 대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유전자 복제로 인해서 발생하는 정체성의 문제는 신분확인의 문제일 뿐, 개별성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물학적인 측면이 아니라 물리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때 개별성의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물리적 측면에서 본다면, 다른 두 사람은 동일한 시·공간 속에서 같은 좌표에 존재할 수 없다.

즉 내가 있는 바로 그곳에 다른 누군가가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개별성이란 일차적으로 내가 타인과 구별되는 ‘몸’을 가지고 물리적으로 독립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내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일차적으로 ‘몸’의 개별성 때문에 가능하다. 엄마와 자신이 서로 분리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아이는 영원히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정신 분석학에서는 이를 ‘상상적 동일시’라고 부른다).

나의 정체성은 언제나 나와 구별되는 너의 존재가 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생물학적 개별성의 문제로 정체성의 문제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유전자의 문제가 아니라, 자극을 받아들이는 신경계와 그 자극을 처리하는 뇌의 개별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당신의 뇌와 똑같은 구조의 뇌를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이는 당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경험하고 행동하는 존재는 세상에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유일한 존재가 된다.

정체성의 두 번째 층위인 ‘다양성’은 인간이 질적으로 서로 다른 다양한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양성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럿이다.

예를 들어, 남자, 한국인, 장남, 학원강사, 기타리스트 등이 모두 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 결국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양한 역할(역할 정체성)과 집단의 구성원(사회 정체성)으로서 자신을 ‘동일시’해가는 과정인 셈이다.

한편, 각각의 정체성은 다층적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인 남성의 경우, 가정에서는 가부장적 권력을 휘두를 수 있으나(가부장적 남성 정체성), 직장에서는 아시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거나(백인 우월주의적 민족/인종 정체성), 반대로 흑인들을 멸시할 수도 있다(차별적 인종 정체성).

이처럼 우리가 다양한 정체성을 수행하며, 어떤 정체성은 상황에 따라서 두드러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왼쪽 그림의 원주 위에는 복수의 정체성들이 포진해 있다(여기서는 간략한 설명을 위해서 두 개의 정체성(a와 b)만을 고려하도록 하자). 그림에서 원의 중심인 ‘I’는 정체성을 수행하는 ‘나’를 의미한다.

왼쪽의 그림은 어떤 정체성도 전혀 작동하지 않는 가상적 상황을 보여준다. 이 때는 특정 정체성이 다른 정체성들보다 두드러지지 않으므로, 모든 정체성은 I로부터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게 된다(이런 이유에서 기하학적 원으로 표시하였다).

그런데 상황이 변화하여 내가 특정한 정체성을 수행하기 시작하면, 어떤 정체성(a)는 다른 정체성(b)보다 두드러지게 작동하게 된다(원의 중심에 가까울수록 그 정체성은 두드러진다).

이에 따라서 원의 모양은 다각형으로 바뀌게 된다. 예컨대, ‘아버지-정체성’이 ‘남편-정체성’보다 상위에 있는 사람은 부부관계보다는 부자(녀)관계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정체성은 개인과 사회에 따라서 서로 다른 위계를 형성한다. 개인적 차원에서 정체성의 위계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인이 특정 정체성을 더 두드러지게 수행하도록(혹은 더 중요하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한편, 사회적 차원에서 정체성의 위계는 특정 사회 집단 내부에서의 서열 관계(군대의 계급제도)나 사회집단 간의 위계(인종 차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정체성의 세 번째 차원인 ‘동일성’은 ‘유일한’ 주체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분열되지 않고, 내적으로 통합된 상태를 유지함을 의미한다. 즉, 동일성은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동일한 나이며, 미래에도 역시 ‘동일한 나’일 것이라는 믿음의 근거가 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기든스(A. Giddens)는 자아정체성의 토대를 ‘존재론적 안전(ontological security)’에서 찾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유아 시절에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함으로써 세계가 일반적으로 살만한 곳이라는 ‘기초적 신뢰(basic trust)’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획득한 존재론적 안정감을 근거로 하여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도 자아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게 된다.

일상생활의 장면 속에서 인간은 다양한 정체성을 수행하면서 살아가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다중인격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다양한 정체성들을 통합하는 기능을 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주체’라고 부르도록 하자. 주체는 다양한 정체성 수행을 조절하고, 통합하는 일종의 ‘관리자’ 역할을 담당한다. 인간의 신체를 하드웨어라고 본다면, 주체는 OS(Operating System)에, 정체성은 구체적 기능을 담당하는 다양한 소프트웨어에 비유할 수 있다.

즉, OS가 컴퓨터의 자원들을 각각의 소프트웨어에 분배하여, 통합적으로 관리하듯이, 주체 역시 동시에 여러 정체성들이 작동할 수 있게 하면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정체성이란 일차적으로 타자와 구별되는 주체의 개별성(유일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때로는 주체가 수행하는 다양한 기능(역할 정체성)들을 의미하기도 하며(다양성), 동시에 개인이 다양한 기능들을 수행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동질적인 연속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동일성).

TOPIA 논술 아카데미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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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 i2u4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