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17일. 5·16에 이어 5월을 의미하는 두번 째 상징적인 날인 그날 남북을 연결하는 역사적인 열차 시험운행이 있었다. 이날 개성행 열차를 탄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는 1980년 5월 17일에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가담 혐의로 연행돼 구속 중이었다.

27년이 지난 이날은 엉뚱하게도 리 전 교수의 날(?)이 되었다.

문산에서 북으로 가는 열차를 탄 북측 대표 권호웅 내각 참사는 개성 자남산 여관에서 열린 공동오찬 도중에 리 전 교수가 있는 테이블로 가 백로술을 권했다.

“1994년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할 때 민족적인 선의의 글을 쓰신 것을 인상 깊게 읽었다”

“리 선생 같은 지조 있는 분이 늙지 않아야 하는데, 남측 잡지에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한 것을 보았다. 붓을 놓으면 안 된다. 말로 해서라도 후손들에게 남겨야 한다. 건강하셔야 한다.”

북한은 93년 3월 NPT 탈퇴 선언을 한 데 이어 94년 6월 13일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도 탈퇴했다. 리 전 교수는 이틀 뒤인 15일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책을 냈다.

그는 책에서 주장했다. “미국은 대북한 전쟁행위 불사의 단계에 있다. (…) 유일 군사 초강대국으로 남은 미국의 노골적 패권주의로 군사갈등 상태를 조성 중이다”고 썼다. 권 참사는 이 대목을 ‘민족적인 선의의 글’로 본 것 같다.

리 전 교수는 2000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져 2년이 지나 인터뷰와 강연 등을 통해 6·15 남북공동선언 후의 남북문제에 대해 조용히 말해왔다. 2006년 9월 18일 12권의 <리영희 저작집(한길사 발행)> 출판기념회에서 그는 절필을 선언했다. 권 참사는 그래서 “붓을 놓으면 안 된다”고 걱정한 것이다.

리 전 교수는 권 참사의 ‘걱정’에 고무된 듯 어눌한 말투로 화답했다. “(내가) 20~30년 길러낸 후배·제자들이 남측 사회를 쥐고 흔들고 있다. 내 건강은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남측 사회를 쥐고 흔들어’라는 대목은 2007년 5월 17일을 ‘리영희 전 교수의 날’로 만들었다. 5월 18일자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리영희 “내 제자들이 남측 사회 쥐고 흔든다”>라는 제목으로 썼다.

“대표적 좌파지식인 리 씨는 과거 북한 핵개발에 대해 ‘미국은 북에 대해 뭔가 갖고 있다. 만들고 있다고 강변한다’고 했었다. ‘이제는 북한이 남한에 대한 위협이라는 근거가 없다’고도 했다.

북한이 실제 핵폭탄을 터트린 뒤에 리 씨가 자기 말에 대해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그는 ‘북핵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무기를 팔아먹으려고 북한을 미사일·핵으로 유도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리 씨는 한미동맹 해체를 주장하고 ‘남한도 북한만큼 악(惡)이고 북도 남만큼 선(善)이라고 했다. 한반도의 남한화를 반대하면서, 남측의 군비축소와 함께 주한미군도 줄여 평화유지군으로 바꿀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과거 친미발언 한 번 했다가 리 씨로부터 공개적으로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고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여권 대선주자 한 사람은 ‘시대의 스승’이라고 하고, 많은 여권 국회의원들은 리 씨를 추기경처럼 모신다고 한다. 리 씨의 말 중에서 ‘내 제자들이 남한을 쥐고 흔든다’고 한 것만은 맞는 말일 것이다.”

‘남쪽을 흔드는’ 리 전 교수는 누구인가. 그는 29년 12월 평북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나 이웃 삭주군에서 자랐다. 42년 경성(서울) 공업학교 입학, 46년 해양대학 항해과 입학, 50년 경북 안동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던 중 한국전쟁으로 군에 입대, 57년 소령으로 제대해 합동통신사에 입사했다.

64년 조선일보로 정치부로 자리를 옮긴 그는 11월에 ‘유엔총회 남북한 동시 초청’ 기사로 구속되어 첫 필화사건을 겪었다. 69년 조선일보에서 베트남 파병 기사로 박정희 정권의 압력으로 퇴사, 72년 한양대 신방과 조교수가 되었다.

그는 20세기에서 쓰고도 21세기까지 남을 명저 20권 중 1위인 <전환시대의 논리>를 74년 6월, 77년에는 <우성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를 냈다. 이 세 책의 내용 때문에 그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2년 징역형을 살다가 박정희 피살 후 80년 1월 광주 교도소에서 출감했다.

84년에는 ‘각급 교과서 반통일적 내용 시정연구회’ 지도사건으로 반공법으로 구속, 2개월 만에 석방됐다.

한국일보에 수요칼럼을 쓰는 전북대 신방과 강준만 교수는 2004년 4월에 낸 <한국 현대사 길잡이-리영희>에서 요약했다.

“리영희는 아홉 번이나 연행되어 다섯 번 구치소에 가고 세 번이나 재판받고, 언론계에서 두 번이나 쫓겨나고, 교수 직위에서 두 번 쫓겨났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1,012일에 이른다. 오로지 진실을 추구했다는 죄 하나 때문에 말이다.”

조선일보 사설이 리 전 교수의 여러 주장 중 <“내 제자들이 남한을 쥐고 흔든다고 하는 말은 맞다”>는 ‘내 제자들은 누굴까?

강준만 교수는 전했다. 리 전 교수는 75년 9월 27일 현 유흥준 문화재청장의 주례를 섰다. 그 후 주례를 서준 사람은 서중석(성균관대 역사학 교수), 유인태(열린우리당 의원), 김세균(서울대 교수) 등 감옥에 같이 있던 대학생들이었다. 과연 이들이 남한을 쥐고 흔들고 있을까? 강준만 교수가 이 글을 읽고 풀어주길 바란다.

박용배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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