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나오신다아! 양반이라고 하니까 노론(老論), 소론(少論), 호조(戶曹), 병조(兵曹), 옥당(玉堂)을 다 지내고 삼정승(三政丞), 육판서(六判書)를 다 지낸 퇴로재상(退老宰相)으로 계신 양반인 줄 알지 마시오. 개잘량이라는 ‘양’자에 개다리 소반이라는 ‘반’자 쓰는 양반이 나오신단 말이오.

-교육인적자원부, 『고등학교 국어(상)』의 ‘봉산탈춤’ 중에서

웃음은 배우는 게 아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웃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아이들이 웃는 법을 배워서 웃겠는가?).

웃음이 인간에게 어떤 진화적인 이득을 안겨주는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많이 웃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걸 보면 웃음이 생물학적인 이득을 주는 건 사실인 듯하다.

또한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이 이성에게 선택될 가능성도 높다고 하니 성 선택의 관점에서도 웃음은 분명 이득을 준다.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도 우리는 웃음이 긴장을 풀어주고,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며, 인간관계에서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을 체험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여타의 생물학적 본능과 마찬가지로 웃음은 사회적으로 관리되며 동시에 사회적인 기능을 갖는다.

남산 한옥마을에서 펼쳐진 봉산탈춤 공연 모습. 고영권 기자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인 <희극>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책장(冊張)에 독약을 발라 희극을 읽으려는 다른 수도사들을 살해하는 호르헤 수사가 등장한다. “웃음이 왜 그리 두려운 겁니까?”라고 묻는 윌리엄 수사의 질문에 호르헤는 이렇게 답한다.

“이 책을 본 학자들이 모든 것에 대해 웃을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 어떻게 되나? 하나님까지도 비웃을 건가? 세상은 혼돈에 빠지게 될 걸세.”

비웃음(誹笑). 엄숙주의자들과 권위주의자들은 웃음을 싫어한다. 웃음 속의 비(非)웃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비웃음은 웃음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내용의 핵심은 ‘도전(빈정거림)’이다.

군대, 학교처럼 권위적이고 엄숙함을 중요시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이런 고함이 들려온다.

“이빨 보이지 마!” 혹은 “실실 쪼개지 마!” 오늘날에도 여전히 포복절도하거나 웃음을 참지 못하는 건 교양이 없는 증거로 여겨지기도 한다. 양반들은 목젖이 드러나게 웃지 말아야 했다. “허허허.”

그런데 웃음이란 게 본능적이라, 아무리 통제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까 즐거운 경우도 많다.

이 점을 깨달은 인간들은 일찍부터 우스운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들기도 했고, 웃음을 유발하는 전문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봉산탈춤이 좋은 사례다. 특히 봉산탈춤이 유발하는 웃음은 ‘민중적 웃음’이라고 부를 만하다.

바흐찐(Bakhtin)은 민중적 웃음이 다음과 같은 세가지 형태를 통해서 표현된다고 설명한다. ①제의적 구경거리들: 카니발의 행렬, 장터의 우스꽝스러운 쇼들 ②다양한 골계문학들: 속어로 구전되고 쓰여진 패러디들 ③다양한 종류의 욕설들. 바흐찐이 연구한 카니발과 봉산탈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두 장르 모두 ‘민중적 웃음’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러한 민중적 웃음은 지배계급의 문화, 달리 말하면 ‘공식문화’를 향한 비웃음이다. 봉산탈춤은 양반들의 공식문화에 대한 반(反)문화 혹은 대항문화로서 비공식적인 영역에서 공식문화를 조롱하고 야유하며 교란시킨다.

민중적 웃음은 봉산탈춤에서 볼 수 있듯이 양반들을 희화화한다. 중요한 점은 웃음과 함께 불만도 표출된다는 것이다. 봉산탈춤은 당시 지배계층이던 양반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실에서는 감히 대놓고 비판하지 못하지만, 탈춤이라는 놀이를 빌어 양반을 비판하는 것이다. 봉산탈춤을 즐겼던 주요 관객들은 대부분 피지배계층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며, 이들 사이에는 일종의 동류의식이 존재했을 것이다.

자신들을 수탈하는 양반에 대한 비판은 일종의 대리만족을 주며, 꿈에서라도 봉기나 반란을 생각지 못하는 사람들일지라도 봉산탈춤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지배계층은 봉산탈춤의 존재를 몰랐을까?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피지배계층들의 놀이문화에 대해서 지배계층은 두 가지 대처를 할 수 있다.

하나는 불순한 놀이를 못하도록 원천 봉쇄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래에서 자생적으로 터져 나오는 문화 욕구를 인위적으로 막기란 매우 어렵다. 몇몇은 괘씸죄로 처벌할 수 있었을 테지만 점점 늘어가는 공연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막을 수 있었을까?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계층이 봉산탈춤과 같은 놀이문화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차피 천한 신분의 광대들의 놀음에 대응한다는 것 자체가 양반의 체면을 깎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설령 양반들이 피지배계층의 사회비판적 놀이문화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손 치더라도, 의도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에서 이를 허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배계층의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봉기나 반란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피지배계층의 잠재적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해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5공화국 시절에 전두환은 3S(Sports, Screen, Sex)정책을 폈다. 군사독재에 대한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정책이었다. 성격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조선의 지배계층들도 사회적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봉산탈춤과 같은 놀이를 묵인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당시는 신분질서가 와해되어 가던 시점이어서, 돈만 있으면 양반신분을 살 수도 있었다. 양반의 권위가 실추되던 시대적 상황은 봉산탈춤과 같은 놀이문화가 번성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결국, 봉산탈춤은 그 저항성이나 민중성이 인정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허가 받은 행사’였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공길과 장생이 벌인 ‘생쑈’처럼, 허락 받은 광대짓은 모욕이 되지 않는 것이다. 고등학교 축제에서 ‘감장’(교감과 교장을 나타나는 은어)의 희화화는 단골메뉴다.

평소라면 곧바로 ‘싸대기’감이지만 축제에서는 용케도 허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맥락에서 봉산탈춤 역시 허용된 일탈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그것을 무리하게 저항적 민중운동과 연결시키려는 건 과도한 해석이다.

다음과 같은 의문들 때문이다. 민중은 그렇게 언제나 전복적이며 혁명적인가? 산발적이고 비조직적인 놀이문화 몇 번으로 지배문화(공식문화)가 무너질 것인가? 지배문화와 피지배문화를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봉산탈춤의 근본적인 한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웃음’을 자아낸다는 데 있다. 이 때의 웃음은 저항성이 탈색된 ‘유희적 웃음’ 혹은 ‘자조적 웃음’이다. 봉산탈춤은 일종의 희극이다.

신분질서가 낳은 갈등은 봉산탈춤이 제공하는 웃음 속에서 자연스레 해소되어 버린다. “거 참 통쾌하다!”라고 말하고 나서는 또 다시 답답한 신분질서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갈등이 쌓일 때쯤이면, 시장통에서 또 한 번 실컷 웃으면 그만이다. 신분질서에 대한 풍자는 새로운 대안이나 구체적 사회개혁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단지 짧은 시간 동안 고통을 잊게 해주는 모르핀과 같은 기능을 할 뿐이다(웃음은 인민의 아편이다?). 이는 오늘날의 코미디 프로그램의 기능과 정확히 일치한다.

사람들은 피곤한 일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기 위해서 코미디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즐기다 보면 그나마 일상의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내일은 어김없이 오늘과 같은 태양이 떠오르는 법이다.

‘야자타임’이라는 놀이가 있다. 이 게임에서 기존의 권력관계는 역전된다. 연장자가 연소자가 되고 연소자는 연장자가 된다. 야자타임의 하이라이트는 게임 종료 직후다.

실컷 하고 싶은 말을 다하던 연소자는 어느덧 소심하고 예의 바른 연소자로 돌아온다. 그리고 연장자의 눈치를 살핀다. 잠깐의 해방은 무한한 즐거움을 주지만, 오히려 그 즐거움 때문에 그 다음에 강제되는 질서는 더욱 깨뜨리기가 어렵다.

봉산탈춤도 마찬가지다. 봉산탈춤이 제공하는 해방감과 카타르시스는 대단하지만 그럴수록 탈춤이 끝난 후 닥쳐오는 기존 질서는 더욱 완고해진다.

어쨌든 웃는 건 좋은 거다. 그러나 동시에 웃고 있는 자신을 돌아볼 줄도 알아야 한다. 제임스 볼드윈의 표현을 빌리자. (성난 얼굴이 아니라) “웃는 얼굴로 뒤돌아 보라!”

TOPIA 논술 아카데미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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