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상륙작전 참전 용사들이 옛 격전장을 찾아 과거를 추억하고 있다. <노르망디=로이터 연합뉴스>
반민 특위가 친일 경찰 노덕술 등을 검거하자 이승만 정부는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 특위 활동은 3권 분립에 위배”되며 좌익 반란 분자들이 살인, 방화 등을 저지르는 상황에서 경험 있는 경찰관을 마구 잡아들이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특별담화를 발표한 데 이어 반민법 개정을 요구하였다.

그 후, 이승만 정부는 일부 의원이 공산당과 내통하였다는 구실로 특위 위원들을 구속하였고, 경찰이 반민 특위를 습격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그리고 1950년 6월 20일로 규정한 반민법의 시효 기간을 1949년 8월 31일로 단축한 법안이 통과됨으로써 반민특위는 해체되고 말았다.

-대한교과서,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1944년 6월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하면서 전세가 연합군으로 기울었고, 비시(vichy)정부는 결국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 점령지역을 전전하다가 독일의 패배로 종식되었다.

1944년 8월 25일에 파리가 해방된 것을 시작으로 다음 해 5월의 독일 항복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영토의 해방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때부터 독일에 협력했던 ‘부역자’들에 대한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방식은 ‘약식처형’이었다.

드골의 임시정부는 초법적 처형들을 막고, 이적행위를 처벌하기 위해서 1944년 독일에 부역행위를 한 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부역자 재판소(Cour de justice)’와 ‘국치(國恥)’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공민권 박탈’형을 부과할 목표로 ‘공민재판부(Chambre civique)’들을 설치했다.

실제로, 1948년 12월 31일까지 프랑스에서는 모두 7,037명의 부역자들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 가운데 791명이 처형되었다. 또한 약 4만 명이 징역형을, 약 5만 명이 ‘공민권 박탈’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에서는 “1949년 9월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화위원회)가 해산될 때까지 취급한 사건은 682건에 지나지 않는다. 이 중 체포 305명, 미체포 172명, 자수 61명이었으며, 559명이 특별 검찰에 송치되어 221명이 기소되었다.

재판이 종결된 38명 중 사형 1명과 무기 징역 1명을 포함해 징역형이 12명, 공민권 정지 18명, 무죄 6명, 형 면죄 2명이었다. 그러나 이들조차 1950년대까지는 재심 청구나 감형, 그리고 형 집행 정지 등으로 모두 자유의 몸이 되었다(금성출판사,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물론 프랑스에서의 부역자 숙청은 사법적 처벌이란 형태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친독-부역 문인들에게는 발표금지령이, 부역 공무원들에게는 징계가 내려졌고, 친(親)비시 노조 지도자들은 노조에서 쫓겨났으며, 친독-부역 신문들은 폐간되었다.

친일-부역 문인들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고, 부역 공무원들이 해방 이후 버젓이 고위 공무원직을 차지하고, 친일에 앞장섰던 신문들이 아직까지 살아남아 주류 행세를 하는 한국의 상황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물론 프랑스와 한국을 똑같은 잣대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프랑스가 독일에 지배당했던 기간이 4년여인 것에 비해, 한국은 36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을 하지 않았던 모든 조선인은 ‘비자발적 부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반민특위는 일본을 도운 행위를 적극적 부일(친일)과 강요에 의한 부일을 구분하여, 후자에는 사면의 가능성을 더 많이 열어 두었다(적극적 부일과 강요에 의한 부일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지만, 여기서는 간단히 권력형 부일을 적극적 부일로 생계형 부일을 강요에 의한 부일로 간주하기로 하자). 어쩌면 친일파 청산이 빨리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해방 이후 조선인들의 심성 속에 남아있던 ‘공범의식’ 혹은 ‘죄책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죄 없는 자는 돌을 던지라”는 말을 듣고 자신 있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었을까?

친일파가 민족이나 조국를 배반했다는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친일파와 애국자의 이분법으로 일제 강점기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현실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듯하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일제 강점기는 민족의 암흑기이자 국통의 단절기다. 그러나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았던 민중들에게는 삶을 지속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일제강점기에 살았다면 독립투사가 되었겠는가?”라고 묻는다면, “절대로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물으면 대부분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유는? “살고 봐야죠.” 이들에게 “이런 매국노 같은 녀석!”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혼자 살아 남기 위해서 공동체를 배신하는 행위는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언제나 정당화될 수 있다. 문제는 공동체가 이런 배신자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는 가이다.

만약 어떤 공동체에서 배신 행위를 눈감아준다면 배신자들의 수가 늘어나고 공동체는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은 배신을 눈감아주는 방향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복수는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심지어는 침팬지들도 자신에게 해코지를 한 대상을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잊지 않고 보복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복수하는 개체가 복수하지 않는 개체보다 생존에 이득을 볼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친일파 처벌은 기본적으로 복수(復讐)의 문제다. 복수는 분노를 진정시켜 주는 작용을 한다. 또한 복수의 기본 원칙은 함무라비 법전에서 볼 수 있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등가교환의 원칙이다.

예컨대, 고대 게르만 사회에서는 혈수(血讐)라는 제도가 존재하여, 어떤 씨족의 구성원이 다른 씨족의 구성원으로부터 살해되었을 때에는 피해자가 속한 씨족의 구성원은 가해자가 속한 씨족의 누구에 대해서도 피의 복수를 할 권리와 의무가 부여되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이런 식의 복수를 억제해왔다.

이제 국가가 제도적 법률을 통해서 복수(처벌)의 방식을 결정한다.

그런데 친일파 청산과 관련해서는 국가에 의한 복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과 다름 없다. 복수는 무한정 지연되었고, 새로운 복수의 가능성은 점점 더 요원해지고 있다. 게다가 이제 친일파 후손들이 환수된 재산을 돌려달라고 소송까지 벌이고 있다.

어떤 인간 공동체든 성문화되어 있지 않은 기본적인 원칙들이 공유된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지 말라”는 원칙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윤리적인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기적인 인간이 비난을 받는 이유는 인위적 도덕법칙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본능적으로 이기적 인간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고통유발자’에 대한 혐오는 모든 동물의 본능이다.

인간은 이기적 본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기적 인간을 찬양하는 문화는 없다. 이는 인간이 이기적이면서 동시에 이기적 인간을 싫어하는 본성도 가지고 있다는 간접적인 증거다.

우리는 “인간은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이기적 인간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인간을 보면 반사적으로 ‘꼴도 보기 싫다’라든가 ‘인간 말종이다’이라고 생각한다.

논리적 이유를 떠올리기 이전에 그냥 싫은 거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왜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지구 반대편의 악당을 혐오하겠는가?

그러므로 친일파에 대한 증오는 생물학적으로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적극적 부일자(친일파)들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십분 활용하여 타인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기회주의적 인간 말종’들이다.

그들은 국가를 팔아먹고, 민족을 배신했다는 거창한 이유보다는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여 배를 채우지 말라”는 원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인해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적법한 절차에 따른 복수를 실천하지 못한 무능한 정부 때문에, 친일파들의 대부분은 안타깝게도 ‘자연사’했으며, 그들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도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는 왜 지나간 일을 이제야 들춰 사회혼란을 초래하느냐는 ‘성인군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불의에 분노하는 본능이야말로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이 획득한 정의의 원천이다. 그런데 문명화된 한국인들은 정의 본능까지도 잊어버린 건가? 리마리오라면 이렇게 외쳤을 거다. “본능에~ 충실해~.”

● 심원 TOPIA 논술 아카데미 선임연구원 약력

- 1977년생

- 서울대 종교학과 졸(2004년)

- 서울대 대학원 언론정보학과 졸업 (2006년)

- 현 TOPIA논술아카데미 강사

- TBS 교통방송 <윤은기의 굿모닝 서울> 문화 평론 프로그램 ‘이반의 반격’진행

- EBS <손석춘의 월드FM> 문화 평론 프로그램‘이반의 천변풍경’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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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 i2u4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