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와 한국의회발전연구회가 공동으로 조사한 대선주자 자질과 성향 결과에는 대선주자들에게 부족한 것 중에는 두 번째로 꼽힌 ‘민족주의’에 대한 것이 뚜렷하지 않았다.

두 번째 부족한 것을 민족주의로 삼은 것은 세계와 동북아, 한ㆍ미, 남ㆍ북 관계를 통합하면 그것은 실존 현황인 민족주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건 민족통일이란 실존을 넘은 이상과 미를 품은 것이기도 하다.

어떻든 이번 조사에서 각 정당의 예비후보 14명중 9명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재임 중 가장 중요한 대외 현안으로 삼았다. 설문이 민족주의에 관한 것이 아니었기에 나온 민족주의에 가까운 대답이다.

민족주의가 왜 대선주자에 중요한 것일까. 대답이 될는지 모르겠다.

40년 전 1967년 5월 30일, 국제정치학회(그 당시 회장 이용희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서울대 박사(63년), 국토통일원 장관(76~79년), 세종연구소 이사장(89~93년), 1917~1997년)는 ‘한국 민족주의 대심포지엄’을 열었다. 그때 50세인 이용희 회장은 ‘한국 민족주의 제 문제’라는 기조연설을 했다. 또 토론에도 참가했다. 그 발언들을 길게 인용한다.

<<저의 발제의 뜻은 한국민족주의가 저항적인 요인을 현재도 내포하면서 그러면서 동시에 오늘날에 와서는 비약을 위해 새로운 양상을 띄어야 하지 않으면 안되지 않겠느냐 하는 점에 있습니다….

….기미년 3ㆍ1운동 같은 경우에는 그 목표가 구체적이고 또 비교적 저항의 ‘타깃’이 단순했던 관계여서 지도자 지도층 대중 간에 혼연의 일치가 있었습니다.

한편 우리가 앞으로 내다보는 한국의 민족주의 문제는 제 생각에는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세계 역사상의 조류-근대 국가적인 방향으로 가는 조류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부여되는 건설적이고 구체적이고 한국적인 민족주의로 가는데 있어서 과연 누가 대중에게 새로운 민족주의 상(像)을 줄 수 있느냐, 그 실현화가 뭐냐 하는 문제로 해석됩니다….

그것은 어떠한 사회지도층이 그 지도층의 ‘이미지’를 대중의 ‘이미지’로 어떻게 부식(扶植) 하였느냐-바꾸어 말하면 지도층의 ‘이미지’를 대중들이 자기의 ‘이미지’로 지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라고 봅니다….

사실 지도층을 지도층으로 결정하는 것은 민중일 뿐이고 또 지도층에 대해서 대중은 심판자입니다.

…한국 민족주의 문제를 단순히 토론하고 과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실은 본질적으로 실체적인 문제이고, 실천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대중의 ‘이미지’, 대중의 지지가 어떤 계층에, 어떤 지도력에 붙느냐 하는 문제로 심판이 나고 결정이 나고 그럼으로써 그것이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근대국가와 과정에 기여하는 방도인 것 같습니다.>>

67년 5월 3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재선을 했다. 이때의 선거를 배경으로 했을 때 이용희 박사의 한국 민족주의론은 ‘저항적 대중’의 지지에 의해서만 지도층은 형성될 수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그것이 괴리되었을 때 건설적이고 구체적인 민족주의-근대화 국가건설은 멀어진다는 것을 뜻했다.

1977년 5월 27일 학계를 떠나 통일원 장관인 60세의 그는 ‘이용희 선생 사은 학술 심포지움’에서 ‘민족주의 개념’이란 감사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한국의 정치, 분단, 통일문제에서 왜 민족주의론이 필요한가를 밝혔다. <<저는 민족주의를 학문상 개념으로 익히기에 앞서서 생활의 체험에서 강렬히 의식하는 방식으로 자라왔습니다.

저는 가친(이갑성, 기미독립선언 33인 서명자. 1889~1981. 제2대 민의원(50년). 자유당 최고위원(53년) 광복회 회장(65년)) 관계로 일제시대에 국민학교 고등학교 전문교육을 모두 사립학교에서 지내야 되었고 그것도 민족주의적 분위기가 짙은 학교에서 시종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까닭인지 저는 민족주의라고 하는 것을 민족주의자의 행동이념이라는 각도에서 처음 느끼고 또 알았습니다. 따라서 민족주의자라는 사람의 존재가 민족주의의 내용을 일차적으로 규정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본래 매우 실천적인 개념으로 단순히 학술상 필요에서 만들어 내놓은 그러한 추상개념은 아닙니다.>>

이용희 박사는 59년에 서울대 외교학과를 창설했고 그때 입학한 김영작 국민대 명예교수(1941년생. 도쿄대 정치학 박사(72년).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97~99년). 현재 고문)는 ‘한국 내셔널리즘의 전개와 글로벌리즘’을 작년 5월 엮었다. 김 박사는 ‘한국민족주의의 전체상: 사상사적 갈등구조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이용희 박사의 ‘실천적 개념’의 변천을 요약했다.

“통일조국의 체제는 오늘날 세계사의 흐름을 유념할 때 사회주의 체제가 될 수는 없다. 다만 남한의 자유민주주의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할 때, 자유민주주의를 기저로 하되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적 가치가 조화를 이룬 ‘공동체적 자유민주주의’(Communalitanin liberal democray)를 지향했으면 한다.”

대선주자들은 이용희 등이 쓴 ‘한국의 민족주의’(75년 한국일보사), ‘한국민족정치와 국제정치’(83년 민음사), 김영작이 엮은 ‘한국 내셔널리즘…’을 읽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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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