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중에서

개념들은 대부분 실재한다고 여겨지는 현상들과 대응한다. 간혹 실존의 여부를 판별할 수 없는 대상을 지칭하는 개념 — 예를 들면, 신(神)이나 외계인 — 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개념들도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축조되는 사유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며, 개념들이 갖는 효과는 실제적이다. 예를 들어, 존재 여부가 불투명한 ‘영혼’이라는 개념이 인류에게 끼친 영향을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개념에 대해서 사고할 때는 반드시 ① ‘개념에 대응하는 실재 대상이 존재하는가?’ ② ‘개념의 형성과 사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제 효과는 무엇인가?’ ③ ‘누가 그러한 개념들을 만들고 사용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예컨대, 시민, 대중, 민중, 소비자 등은 분명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인간집단을 가리킨다.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인간들의 집합을 K라 한다면, K={2007년 8월 O일 OO시 현재, 대한민국 영토 안에 존재하는 인간}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시민, 대중, 소비자 등은 집합 K의 부분집합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 인간이 경우에 따라서 시민, 대중, 민중, 다중, 소비자 등으로 달리 불리는 것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즉, 집합 K의 원소인 시몽은 특정 조건에서 시민이나 소비자로 규정되고, 동시에 두 가지 혹은 세 가지로 규정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민이 누구냐, 민중이 누구냐, 대중이 누구냐를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조건에서 한 인간이 시민으로, 대중으로, 민중으로, 소비자로 규정되는가와 누가 이들을 그렇게 규정하고 불러내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시민으로, 소비자로 호명되고 거기에 응답해야 한. 끊임없이 걸려오는 텔레마케팅 전화도 그중의 하나이다.

어떤 조건에서 시몽은 시민이 되는가? 일단은 내가 스스로를 ‘시민’으로 자각할 때일 것이다. 이러한 자각은 의식적이며, 자주 찾아오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자각하지 못한 채 시민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보았을 때, 마음 한편에서 그것을 쓰레기통에 넣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럴 때마다 의식적으로 ‘나는 시민이다. 그러므로 시민의식을 발동하여 저 쓰레기를 주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민이라는 자각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습관적으로 쓰레기를 줍거나 무시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의식적으로, 혹은 자동적으로 ‘시민’으로서 행동하게 되는 상황과 조건이다. 이러한 상황과 조건은 상존한다.

내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늘 자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늘 남성처럼 행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도시의 삶 속에서 나는 늘 시민으로서 행동하고 있다. 도시에서의 삶 자체가 끊임없이 ‘시민’으로 살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가지 규범, 법, 제도, 교육 등을 통해서 시민의 삶을 ‘몸’에 체화되고 내면화한다. 각기 양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대중, 민중, 소비자 등도 마찬가지이다.

TV에서 박지성이 출장한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볼 때, 밤잠을 설치면서 그 경기를 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는 대중이 된다.

마찬가지로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으며 ‘디워’를 볼 때, 손에 들고 있는 과자의 종류만 다를 뿐, 비슷한 포즈로 영화를 보는 옆 사람들과 함께 나는 대중이 된다. 엄밀히 말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대중으로 규정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나는 하루 종일 소비자로 호명되고, 거기에 응답한다. 귀찮을 정도로 자주 걸려오는 마케팅 전화는 늘 “안녕하세요, ~고객님 핸드폰 맞으시죠?”라고 묻는 것으로 시작해서 “고객님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로 끝난다.

하루 종일 우리의 감각기관을 지치게 하는 수많은 광고들 역시 소비자로 규정되는 우리의 욕망을 자극할 목적으로 생산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소비자로 호명당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를 스스로 소비자임을 인식하는 것은 서비스가 불량한 가게에서 ‘손님은 왕이다’라고 중얼거릴 때 정도일까.

진보적 정치 집단이 개최하는 집회에 참여했을 때, 나는 돌연 평범한 시민에서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인 ‘민중’으로 다시 호명된다.

그러다가도 집회에서 간식을 파는 아저씨가 “김밥하나 드릴까요?”라고 물을 때면, 어느새 완고한 소비자가 되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됐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간식 파는 아저씨야말로 소위 ‘제대로 된 민중’의 한 사람일 텐데도 나는 왜 그를 민중이 아니라 장사꾼으로만 본 것일까?

나는 언젠가 버스에 올라 탄 일군의 여성들이 버스카드를 단말기에 대자 ‘청소년입니다’라는 짧은 기계음이 울리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청소년인지 성인인지 구별하기 힘든 외모였지만, 아무튼 그들은 단말기에 의해서 ‘청소년’으로 호명되었다. 그 때, 그 여성들 중 한 명이 ‘쪽팔리게..’라고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버스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 여성들은 청소년처럼 보이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자신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청소년으로 호명’되었다.

이처럼 우리가 소비자, 대중, 민중, 청소년 등이 되기 싫다고 해서 되지 않을 수는 없다.

어떤 사회에서든 살아가려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비자로, 대중으로, 시민으로, 민중으로 부르는 목소리에 적절히 응답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렇게 끈질기게 우리를 불러 대는가?

그건 바로,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흘러 다니는 집합 K의 원소들을 어떤 식으로든 규정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윤 추구, 정권 창출, 체제 유지나 변혁, 현상에 대한 학문적 설명)을 위해서 이러한 개념들을 만들고, 유통시키고, 사용한다. ‘시민(대중,민중, 소비자)이 어쩌고저쩌고.’

그런데 개념들이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호명된 당사자들이 응답해야만 한다. 그리고 효과는 호명에 대한 응답이 자동-기계적일수록 강하다.

만약 호명된 인간들이 응답을 거부한다면, 개념들은 실제적인 효과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노동자 계급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는 있으나, 노동자로 규정된 인간이 그 사실을 주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노동자 계급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면 노동자 계급이라는 개념이 무슨 소용일까?

이러한 상황에서 객관적인 노동자계급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 사실을 알리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선교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반면에 ‘대중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혹은 대중이라는 개념과 대응하는 대상이 실존하지 않더라도, 사회 안에서 대중이란 말이 유통되고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실제적 힘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그건 단지 목소리가 아니다. 마치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는 줄처럼 제멋대로 우리의 사고와 행동까지 규정할 수 있는 권능 그 자체다.

그 목소리는 그저 의미 없는 사물조차도 꽃으로 만드는 마법의 주문이다. 김춘수의 ‘꽃’처럼 나를 불러주었다고 그 부름에 마냥 기뻐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바라는 반응이다.

자, 귀 기울여 보자. 만약 당신을 부르는 목소리들이 들린다면, 이등병이 관등성명을 대듯이 바로 대답하지 말고, 뜸을 들이라. ‘나는 남잔데(혹은 여잔데) 당연히’, ‘나는 한국인인데 당연히’, ‘나는 ~인데 당연히’라고 생각하기 전에, 스스로 물어보자. ‘도대체 왜, 어떤 목적으로, 누가 나를 이런 식으로 부르는 거지?’

자동 응답 기계가 되지 말란 말이다.

● 약력

- 1977년생

- 서울대 종교학과 졸(2004년)

- 서울대 대학원 언론정보학과 졸업(2006년)

- 현 TOPIA논술아카데미 강사

- TBS 교통방송 <윤은기의 굿모닝 서울> 문화 평론 프로그램 ‘이반의반격’진행

- EBS 손석춘의 <월드FM> 문화 평론 프로그램‘이반의 천변풍경’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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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 TOPIA 논술아카데미 강사 i2u4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