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전쟁과 함께 의사, 열사들의 항일 투쟁도 잇달았다. 미국 유학 중이던 장인환과 전명운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제의 앞잡이로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 행위를 선전하는 데 앞장섰던 미국인 스티븐스를 살해하였다. 이 사건은 이후 항일민족운동 전개 과정에서 ‘의열 투쟁’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금성출판사, 고등학교 근현대사

얼마 전 한 대학에서 강의하던 외국인 강사가 김구 역시 테러리스트였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가 학생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김구가 누구인가?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며, 그의 글은 교과서에도 실려 많은 청소년들에게 읽히고 있다. 또한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 조사에서 늘 1위를 다투는 민족영웅이다.

그런 그를, 그것도 외국인이 테러리스트라고 했으니 피 끓는 젊음들이 열 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그러나 ‘테러리스트’라는 말에 부착되어 있는 부정적 의미들을 제거한 채 사전적 의미로만 이해한다면, ‘김구는 테러리스트였다’는 명제는 거짓이 아니다.

사전에 따르면, 테러리즘은 ‘어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직접적인 공포 수단을 이용하는 주의나 정책’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우리 주위에 널린 게 테러리스트들이다.

미국 워싱턴 백악관 뒤뜰에서 열린 9^11 테러 6주기 추모식 모습.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부인 로라 부시 여사, 디 체니 부통령과 부인 린 체니 여사(왼쪽부터)가 백악관 직원들과 함께 묵념을 하고 있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최루탄과 지랄탄을 날렸던 경찰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닌가? 학교에서 ‘사랑의 매’라는 미명하에 볼기짝을 피멍들도록 두들기는 교사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닌가?

또 군기를 잡는다는 목적으로 후임병들에게 얼차려를 가하는 선임병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닌가? 정치적 목적이란 결국 권력의 소유이며, 이는 거시정치든 미시정치든 마찬가지다.

사실 한국 사회는 일제 강점기 이후 군사정권 시기까지 오랜 기간 공포정치를 경험했으며,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공포를 이용한 권력 장치들이 작동하고 있다.

악취에 오래 노출되면 면역력이 생기는 것처럼 우리는 테러리즘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사는 것에 익숙해졌을 뿐, 한국은 오래 전부터 ‘테러국가’였다(물론 일상적으로 쓰이는 ‘테러국가’라는 뉘앙스와는 다른 의미에서).

대학생들이 ‘김구는 테러리스트였다’는 말에 광분한 이유는 테러리스트라는 말에 부착된 부정적 의미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테러를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악(惡)’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테러리스트들 역시 모조리 악당들이 되어야 한다. 반면, 독립운동은 무조건 ‘선(善)’이므로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선인(善人)이어야만 한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른다면 독립운동가는 절대로 테러리스트일 수 없다. 이처럼, 독립운동에 대한 미화를 넘어선 신성화의 결과 독립운동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폭력을 주제로 수업을 하게 되면, 나는 늘 안중근과 빈 라덴의 이름을 칠판에 써 놓고, 둘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말해보라고 한다. 학생들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을 찾는 데 애를 먹는다.

결국 안중근의 행위는 민족을 위한 거사였고, 빈 라덴의 행위는 잔인한 테러였다는 생각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는 학생들도 꽤 있다.

그러나 영민한 학생들은 둘 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폭력을 사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진짜 토론은 여기서부터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안중근의 폭력과 빈 라덴의 폭력은 어떤 점이 다른가?” 토론은 보통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진행된다.

학생: “안중근은 한 명을 죽였지만, 빈 라덴은 수천 명을 죽였어요.”

시몽: “그럼, 한 명을 죽이면 민족영웅이고, 수천 명을 죽이면 테러리스트냐?”

학생: “아니죠, 안중근은 일제의 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거니까, 무고한 시민들을 죽인 빈 라덴과는 달라요.”

시몽: “그래도, 사람을 죽인 건 마찬가지잖아. 그럼 넌 때에 따라서는 대의를 위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학생: “당시에는 그런 방법 밖에는 사용할 수 없었잖아요.”

시몽: “왜? 인도의 간디나 미국의 루터 킹 목사는 비폭력이라는 방법도 사용했잖아.”

학생: “아휴!, 그건 너무 이상적이에요. 지금 나라를 빼앗겨가지고 열 받아 죽겠는데, 비폭력으로 언제 독립해요?”

시몽: “그럼, 정당한 폭력이 있다는 거네?”

학생: “그렇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폭력은 정당한 거죠. 가만히 있는데 누가 와서 때리면 맞고만 있어요? 맞서 싸워야죠.”

시몽: “그럼, 안중근은 좋은 테러리스트네.”

학생: “그렇죠! 빈 라덴은 나쁜 테러리스트고.”

시몽: “그럼, 도시락 폭탄을 던진 윤봉길도 좋은 테러리스트겠네?”

학생: “그런가? (뜸을 들인 후) 그렇죠.”

시몽: “너 그거 아냐? 홍커우 공원 의거 때 일본인 사진기자를 비롯한 수명의 일본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그 사람들은 무고한 시민들 아닌가?”

학생: “어쩔 수 없는 거죠. 자기 나라가 잘못했으면, 그 나라 국민들도 약간은 책임을 져야 하는 거니까. 솔직히 일본이 조선을 침략 안 했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 아니에요?”

위 대화 속에는 몇 가지 논점들이 숨어 있다. 먼저 정당한 폭력이 있을 수 있는가이다. 이 때, 문제는 누구의 입장에서 ‘정당한 폭력’인가 하는 것이다.

예컨대,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군사 정권의 입장에서 광주시민들은 법을 어기고 난동을 부리는 폭도에 지나지 않는다. 즉, 광주시민들의 폭력행위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난동’ 즉, 부당한 폭력이다(광주민주화항쟁과 관련하여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아직까지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공수부대를 동원해서 시민들을 학살하는 군사정권의 공권력이 부당한 폭력이며, 그에 대항해서 싸우는 자신들의 폭력은 정당한 폭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결국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동일한 폭력이 정당하게도 또 부당하게도 평가될 수 있다.

만약 정당성의 기준이 상대적이라면 폭력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객관적 기준이란 존재할 수 없다. 안중근이나 이봉창의 테러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테러는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좋은 테러지만, 당시 일본인들의 관점에서는 나쁜 테러다. 또한 대의를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허용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는 독립운동가의 테러를 용인하겠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관점에서는 안중근이나 빈 라덴이나 똑같은 테러리스트다.

결국, 폭력 그 자체는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은 도구일 뿐이며 그것이 어떤 목적에서 누구에 의해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폭력의 정당성은 사후적으로 사람들에 의해서 인정받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수단으로서의 폭력은 정당하다고 평가되는 듯하다.

어떠한 종류의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무조건적 비폭력 운동은 폭력이 개인의 마음가짐에 달린 문제이므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면 폭력은 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 본성을 근거 없이 신뢰한다는 점에서 또, 구조적 폭력의 가능성에 대해서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을 직접 실행했던 독일군들이 모두 폭력적인 사람들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군대의 명령 체계에 복종했을 뿐이다. 즉 구조적으로 생산되는 폭력들을 개인적 노력으로 극복할 수는 없다.

한편, 우리는 정당한 폭력이 사용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고한 희생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정당한 폭력이라고 해도, 무고한 피해자에 대한 도의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파시즘적 논리로 무고한 피해자의 발생은 불가항력적이라고 변명해서도 안 된다.

예를 들어, 윤봉길의 테러는 분명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윤봉길을 애국지사로서 숭앙만 할 뿐, 무고한 희생자들에 대한 일말의 책임도 느끼지 못한다.

이런 상황을 당연시 한다면, 우리는 고(故) 김선일 씨의 죽음에 대해서도 할 말이 별로 없게 된다. 테러리스트들의 입장에서는 그 역시 이라크 해방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희생된 불운한 사람일 뿐이지 않은가.

폭력은 절대로 허용될 수 없다는 순진한 생각도 문제지만, 대의를 위한 폭력은 아무런 비판 없이 용인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문제다. 우리는 빈 라덴의 테러를 비판하는 눈으로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남이 하면 비열한 테러고 우리가 하면 위대한 투쟁인가? 정말 그런가?’

■ 시몽 약력

- 1977년생

- 서울대 종교학과 졸(2004년)

- 서울대 대학원 언론정보학과 졸업(2006년)

- 현 TOPIA논술아카데미 강사

- TBS 교통방송 <윤은기의 굿모닝 서울> 문화 평론 프로그램 ‘이반의반격’ 진행

- EBS 손석춘의 <월드FM> 문화 론 프로그램 ‘이반의 천변풍경’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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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 http://creativelab.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