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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기 선생의 '슬픈 조국의 노래'


숭례문이 전소된 기사가 실린 2월 12일자 한국일보 ‘사람들’면에 “ ‘부민관 폭파’ 고(故) 조문기 의사 겨레장 엄수”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다.

이날 조선일보 ‘사람들’란에는 “애국지사 최상제 선생 별세”라는 85세로 죽은 광복군 활동가의 기사는 있어도 조문기 의사의 기사는 없다. 조선일보는 조 의사의 서거기사도 실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2월 10일자에 “1945년 부민관 폭파의거의 주역인 독립운동가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 5일 별세했다. 향년 81세”라는 부고 기사를 실었다.

왜 조선일보는 조 의사의 서거, 장례기사를 실지 않았을까?

대답이 될는지 모르겠다. 2005년 3월에 나온 “조문기선생 회고록 –슬픈 조국의 노래”에는 조선일보와 조 의사와의 ‘부민관 폭파의거’를 둘러싼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를 요약한다.

<<조선일보 73년 7월18, 19일 자에 <이설 한국사>라는 기획기사가 제법 비중있게 연재되고 있었다. 제목 옆에 <부민관 폭탄사건, 주모자 누구인가>라는 부제가 눈길을 끌었다. 기사내용인즉 부민관 거사가 백범 김구 선생의 비밀지령으로 이루어졌으며 임정첩보 36호도 김정균, 남의태, 엄숙록 등이 거사 주역이라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우리 3인방(애국청년당의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은 그들에게 포섭되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행동대요, 하수인일 뿐이라는 것이다. 당사자인 나로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들 이었다. 나는 친지에게 구두를 빌려 신고 차비를 얻어 집필자인 조선일보 이규태 사회부장(1933년생, 2006년 졸)을 찾아 갔다.

“당신이 이 기사 집필자?”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 기사를 보고 왔소, 이거 확실한 거요?”

“그럼요. 제보자가 있는 걸요.”

“확인은 해봤소?”

“예?”

이규태 부장은 당황했다.

“내가 당사자인 조문기요. 이 기사는 조작된 거요! 이 자리에서 증명해 보이겠소.”>>

이규태 부장에게 제보를 한 사람은 “내무성 고등관으로 일했다”는 김형극이였고 조 의사와 대질 끝에 거짓임이 드러났다. 1986년에도 김형극의 가상 독립운동이 TV스크린을 탔다. 결국 86년 7월24일 한국일보 사회부 손태규 기자가(현.단국대 언론학부 교수) 김형극의 실체를 파악해 보도했다.

조 의사의 회고를 요약한다.

<< <엄청난 독립운동가의 사기극 – 도대체 김형극의 정체는 무엇인가?> 정말 놀라웠다. 그가 한 모든 말, 그가 했다는 모든 일들이 깡그리 거짓말이었다. 나도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고등관이 아니었다. 일제시대 가네우미 에이다로 라는 창씨명으로 공주군 유구면의 부면장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미군을 따라다니며 실속을 챙기다가 끝내 선박수주에 얽힌 대형 사기사건으로 4년이나 징역을 치른 자였다.>>

조 의사가 회고하는 45년 7월24일 ‘부민관 거사’를 요약한다.

<<애국청년단 의장인 유만수(조문기와 1942~44년 일본강관 연수생)는 7월24일 박춘금(전 중의원)의 ‘아시아 민족 문격대회’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폭파키로 했다. 부민관 무대 위는 참으로 군침 도는 자리였다. 한쪽엔 총독, 정무총감, 군사령관 등 침략원흉들이 거드름을 피며 앉아 있고, 다른 쪽엔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 괴수들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몇몇 나라에서 온 친일대표들이 앉아 있었다. “저 놈들을 한방에 다 날려버릴 수만 있다면 …” 무슨 짓이던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온 폭탄은 손으로 던지는 도시락 폭탄이 아니라 시한폭탄이라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복도 한 쪽 소파에 앉아 폭탄 설치 장소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 우리는 몸이 달아서 주변에 헌병이 오가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떠들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헌병의 호통에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운이 좋았을까. 헌병은 소파 바로 옆에 붙은 식순을 만지작거리는 아이에게 달려가 뺨을 후려쳤다. 아이는 놀라서 울기 시작했고 부모는 큰 죄를 짓기라도 한 듯 헌병에게 빌었다. 우리는 폭탄을 들고 앉아서 멍하니 헌병을 보고 있었다. 그때 박춘금의 등장을 알리는 마이크 소리가 복도로 흘러 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셋은 벌떡 일어나 오른쪽 옆문으로 들어갔다. 폭탄 하나는 계단문에 다른 하나는 무대 밑에 설치했다. 우리는 길 건너 시청 앞에 서서 시계를 보았다. 하오 9시9분 50초 초침은 어느 때 같이 냉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팡! … 콰쾅!” “성공이다! 완벽한 성공이다!” 대회는 쑥대 밭이 되었다.>>

그때 조문기 19세, 강윤국 20세, 유만수 23세였다.

조문기는 1982년까지 포상을 신청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포상을 받기 위해, 타인들에게 존경을 받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라는 나름대로의 소박한 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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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8/02/21 14:42




박용배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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