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3월5일), 작년 11월에 아마존닷컴에 주문했던 로버트 마이어 박사의 “역류 속의 한국-세기의 투쟁과 통일의 위기”(2001년 5월 나옴)를 읽을 때만 해도 가슴이 뭉클하지 않았다.

올해 84세의 로버트 마이어 박사는 1948년 시카고대를 나와(정치학박사) 전략정보국(OSS) 요원으로 중국 시안에서 임정의 광복군과 함께 독수리 작전(한국상륙 및 첩보작전)에 참가했다.

이후 CIA요원으로 50-52년 타이완 근무, 60-62년 캄보디아 주재, 63-65년 극동부 책임자로 일했고, 이후 워싱톤니언(월간) 공동발행인, 뉴 리버브릭 편집장(79년까지), 카네기재단 윤리 및 국제안보 이사장(1995년까지)을 지냈다.

‘역류 속 …’에서 마이어 박사가 98년 12월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를 서울에서 만나 2시간여 동안 인터뷰한 대목을 읽으면서도 그의 근황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200쪽짜리 책값이 무려 75달러로 내가 그동안 주문한 책 중 단일본으로는 가장 비싸다는 것을 느끼고 또 느꼈을 뿐이다.

날이 밝아 조선일보 시론 난에 한동대 김미영 교수(국제 기업가정신 과정)의 ‘황장엽 씨의 자리’라는 글을 읽고 가슴이 무거워져 왔다.

황씨가 97년 2월 서울로 망명, 여러 어려움을 겪을 때 그를 취재했고 미국에 초청됐을 당시 그를 수행했던 김미영 교수는 그의 요즈음을 요약했다.

<<1997년 망명 당시 황장엽 씨는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리고 북한을 해방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의기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등장으로 보기 좋게 꺾였고, 그는 10년이 넘는 세월을 대부분 집필과 독서로 고독하게 보냈다. 2003년 겨우 한 차례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것을 빼고는 그의 활동은 국내외에서 극히 제한되었다. 필자는 그의 미국 방문길을 수행했으므로 그가 워싱턴에서 보낸 열흘조차 얼마나 숨막혔는지 잘 알고 있다. 지난 대선 때 황장엽 씨는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 후보가 당선된 뒤 그는 애써 기대를 감추고 “이제 나는 1년 정도만 더 살았으면 한다”고 말해 애잔한 느낌을 남겼다. 그는 다만 새 정부가 자신의 ‘외국 방문’ 길만은 좀 열어주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말했다.>>

여기서 “이제 나는 1년 정도만 더 살았으면…” 대목이 가슴을 짓눌렀다.

로버트 마이어 박사는 98년 12월 황씨와의 인터뷰를 샌프란시스코 영사관에 신청해 허락을 얻어냈다. 마이어 박사가 황씨에게서 가장 듣고 싶은 대목은 “김대중 정부의 ‘선사인’ 정책은 북한에 효과를 낼까” 였다. 마이어는 그와의 인터뷰를 요약했다.

<<하오 2시에 시작된 인터뷰는 3시 30분에 끝났다. 암울한 12월의 날 만큼 어두운 검회색 신사복 차림의 그는 동양의 자신만만한 인사가 그렇듯이 대화 중 발을 떠는 짓이 잦았다. ‘선사인’ 정책에는 즉답을 피했다. 북미 외교 관계에 대해서는 우려가 깊었다. 그는 말했다. “북한은 미국과 국교 및 서로의 수도에 외교공관 개설을 바라지 않는다. 김일성과 그의 후계자는 소련의 붕괴원인을 두 가지로 보고 있다. 후르시초프의 국가이데올로기(스타린 주의) 비판과 1973년 헬싱키 인권조약이 소련에 인권사상을 가져왔다는 점, 그리고 고르바초프가 군대를 약화시킨 점이다. 북한은 이런 오류가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이다.… “나는(황장엽) 미국이 당장 영사관을 개설하자고 제안해도 북한이 이를 듣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비록 미국의 북한전문가들이 나와 의견이 다르지만 나는 자신한다.” “북한을 다루는 한국은 인도주의에 의한 식량원조 등에는 계속적이고 세밀히 해야 한다. 그러나 인권에 대해서는 항상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북한의 인민은 큰 감옥 속에 사는 수인이다.” “북한은 전체주의 권력이다. 주체라는 인도주의적 자생, 자립은 권력 유지의 독재술수로 변질되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성공할까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하기 어렵다”>>

마이어 박사는 황씨가 가족을 버리고 남으로 온 인간적 고뇌문제에 대해 더 묻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2001년 ‘역류 속…’을 낼 때까지도 이런 ‘괴로운’, ‘암울한’ 황장엽의 75세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눌렀다고 쓰고 있다.

‘역류 속…’에는 황장엽 씨에 대한 대목이 4쪽이나 된다. 김정일 1쪽, 김일성 9쪽과 비교해보면 상당한 양이다.

마이어 박사는 적어도 1945년에서 2008년까지 ‘역류 속 한국’을 지켜 봤고 그나름의 세계관과 민주주의관으로 한국을 북한과 통합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의 책에 깨알 같이 박혀 있는 ‘한국’이란 말속에는 ‘민주주의’, ‘시장경제’가 가장 적합한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그는 “정의를 이루려는 인간의 능력은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지만 정의가 아닌 것에 빠지는 인간에겐 민주주의가 치료약이다”고 생각한다.

황장엽 씨가 ‘역류 속 한국’을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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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