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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국격이 침몰했다… 서로 믿으면서 합심해 새 기둥 만들어야"

[창간 기획-국격을 높이자 ③]
세월호 참사, 자살률 최고… 우리들의 수준이고 민낯
대한민국 최대 문제는 불신… 선진국의 토대는 신뢰
믿고 친절하게 말하는 개인의 품격이 국격의 토대
[정운찬 전 국무총리 특별 기고] "이번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아 인격을 닦듯이 ‘국격’(國格)을 닦을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다져야 한다."2006년 1월 1일, 한 신문이 ‘2020년을 위한 국가 과제’를 묻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어떤 미디어전문가는 칼럼을 통해 그때 내가 사용한 ‘국격’이란 말이 제6공화국 이후 거의 처음으로 언론에 등장한 용례라고 밝혔다.

당시 서울대총장으로 황우석 교수 사태를 겪으면서 무조건적 애국심보다 정확한 진실이 오히려 국격을 높인다는 것과, 서로 신뢰할 수 있는 풍토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감해 ‘국격’이란 말을 썼다. 그 후 국무총리 시절에도 국격 제고를 위한 국민 실천운동을 전개하는 등 ‘국격’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요즘도 여전히 각종 인터뷰와 기고문에서 ‘동반 성장’과 더불어 가장 자주 쓰는 단어가 ‘국격’이다.

자살률, 교통사고사망률 최고… "국격이 침몰했다"

그런데 2014년인 지금, 국격이 향상되기는 커녕 사람들은 "세월호와 함께 국격도 침몰했다"고 한다. 또 최근 일어난 군대 폭행 사건이나 각종 비리들로 ‘국격’이란 말을 꺼내기도 참담한 심정이다. 세월호 참사 같은 사건이 아니더라도 한국은 자살률, 이혼율, 교통사고 사망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또 세계인이 꼽은 이민 가고 싶은 나라에선 50위 정도다. 이것이 우리들의 수준이고 민낯이다. 너무 참담하지만 그렇기에 이제야말로 국격, 국가의 품격에 대한 논의와 성찰이 절실히 필요할 때다.

국격은 지도자의 인품이나 탁월한 지도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혹은 올림픽 메달 수나 노벨상 수상자의 수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국격은 나라 국(國), 격식 격(格)을 합친 말로, 사전적 의미로는 한 나라의 정부나 시민들이 갖추어야 할 예의들을 이르는 말이다. 시민과 정부가 예의를 갖추려면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감’이 필수다. 믿음이 국격의 토대란 말이다.

신뢰가 국격의 토대… 미국에선 학생을 믿어준다

1970년대 중반, 미국 유학 시절에 읽은 칼럼과 직접 체험한 일들이 ‘신뢰’의 참뜻을 일깨워주었다. 당시 뉴욕타임즈지에 한 중견 변호사가 갓 로스쿨을 졸업한 아들에게 주는 글은 이런 내용이었다. “아들아. 앞으로 인생에서 너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좋은 사람(good guy), 나쁜 사람(bad guy), 추한 사람(ugly guy)이다. 그러나 때로는 잘 모르는 사람(unknown guy)도 만날 것이다.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일단 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라. 그는 너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좋은 사람이 될 확률이 높다. 그것이 신뢰 사회를 만든다.”

미국 은행들은 가난한 유학생에게도 개인수표를 발급해 주었다. 또 학생이 낡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타이어에 펑크가 났을 때 현금이나 카드가 없었는데도 학생증을 보여주면 "‘나중에 갚으라"면서 계좌번호를 적어주고 보내주었다. 대부분의 대학은 학생들이 학업 성적이 부진하면 탈락시키기보다 “우리는 너의 실력을 인정해 합격시켰다. 넌 공부할 능력이 있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이니 우리가 도와 주겠다”며 학교에서 학습 지도를 해준다. 학생을 믿어 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최대 문제는 불신의 늪… '천격' 걷어내야

현재 대한민국은 양극화를 비롯한 각종 문제가 많지만 가장 심각한 것이 ‘불신’이다. 국민은 정부를 못믿고, 국회는 청와대를 안믿고, 청와대도 국회를 안믿으며, 같은 당에서도 계파가 다르면 반목한다. 물론 믿음을 깨뜨리는 사건들이 너무 숱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못믿겠다”고만 주장하면 그 어떤 일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제라도 누군가가 “믿어보자”는 말을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의혹과 불신의 벽을 깨뜨려야 한다.

물론 신뢰는 말이 아니라 태도에서 나온다. 사회의 어떤 곳에서 일하더라도 자기가 서 있는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마음가짐이 주변의 신뢰를 얻고 결국 인격과 국격으로 이어진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삶의 태도가 대표적이다. 안창호 선생의 미국 생활은 곤궁했다. 그러나 미국인 가정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하면서도 손수 청소도구를 만들어 자기 집을 가꾸듯 화장실과 변기를 항상 깨끗하게 청소하는 모습을 지켜본 주인이 “You are not a boy, you are a man.”(당신은 소년이 아니라 훌륭한 어른)이라고 존중했다. 누군가에게 신뢰를 얻으면 나이와 지위에 상관없이 어른 대접을 받는다.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도 국가 지도층보다는 차라리 묵묵히 일하던 노동자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던 국민들이 있어 가능했다. 독일에서 간호사와 탄광부로 일하면서도 성실함을 인정받고 그 돈을 조국에 송금하던 ‘신뢰할 수 있는’ 교포들의 눈물과 땀 등도 더해서 이제 어엿한 강중국(强中國)이 되었다.

이어령 교수는 국격을 높이려면 “우선은 우리 안의 ‘천격(賤格)’을 걷어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격의 대표적인 것이 천박하고 저속한 말이다. 국회에서 상스런 욕설이 난무하고 인터넷에서도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비속어들이 가득하다. 식당에서,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심지어 여학교 교실에서도 저급한 말들이 흘러 넘친다. 드라마에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과격한 말을 일삼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시사 프로에서도 욕은 아니어도 한심한 수준의 언어를 구사한다. 세계인이 인정하는 가장 아름다운 글자와 존댓말이 있는 한국어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니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의 인격 또한 그 지경에 이른 것 같다. 아니 그런 천박하고 과격한 언어가 인간이 아닌 괴물을 만들기도 한다.

묵은 기둥 무조건 빼내면 붕괴… 합심해 새 기둥 준비해야

서로 불신하고 심지어 언어마저도 천격의 수준으로 추락한 지금, 100년 전 서재필 선생이 한 말이 새삼 떠오른다. “목수가 헌 집을 고치려면 썩은 기둥과 서까래를 갈아내야 할 터인데, 그 기둥과 서까래를 빼내기 전에 새 기둥과 서까래를 준비하였다가 묵은 재목을 빼내면서 새 재목을 대신 집어넣어야 집이 무너지지 않고 네 기둥이 튼튼하게 선다. 그런 연후에 도배와 장판과 유리창도 하고 좋은 물건도 방과 마루에 놓아야 일이 성실히 되고 다 된 후에 사람이 살게 되는 것이다. 만약 목수가 새 기둥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기둥이 썩었다고 그저 그 기둥만 빼버린다면 보기 싫은 기둥이 없어졌으니 상쾌하기는 하겠지만 새 기둥이 옛것 대신 들어서지 못한 즉 집이 무너지기 쉬운 것이다.”

이 말에는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성급하게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좌절하고는 핍박 끝에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 선생의 뼈저린 자기성찰이 담겨 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미국과 중국, 미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의 이해관계 가운데 놓여진 우리 나라의 환경이 100년 전 구한말과 너무 흡사하다고 한다. 그 당시의 실수나 아픔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이제라도 새 재목을 합심해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국격 역시 하루아침에 높일 수는 없다. 지금 "병들었다, 한심하다"며 대책 없이 썩은 기둥을 뽑기보다 새기둥, 즉 새로운 대안도 마련해야 한다. 서로 믿자. 그리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 쓰기부터 시작하자. 한 예로 서울신학대학교가 앞세우는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말하기 운동을 참고로 하면서 말이다.

서로 믿고 품격 있는 말 쓰는 개인의 습관이 국력을 키운다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 역시 지도자의 힘보다는 차라리 개개인의 인식과 행동에서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 국격이 살아날 희망을 본다. 세월호 사건 때 진도로 달려간 2,000여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 학생을 먼저 대피시키려다 숨진 승무원과 교사들, 국가에서 주는 돈은 한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며 아들에게 가장 싼 수의를 입힌 아버지 등은 그 어떤 품격있는 말보다 더 귀한 행동을 보인 분들이다. ‘배워서 남주자’며 빈곤층 학생들에게 공부를 지도해주는 대학생들, 돼지저금통을 털어 갖가지 성금을 내는 초등학생들이 아직은 많다. 이들은 항상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와 끊임없는 실천으로 품격 있는 인생을 사는 분들이다. 이런 인격들이 모여 한 나라의 국격을 이룬다. 그리고 그런 국격이 바로 진정한 국력이다. 서로 믿고, 품격있는 말을 쓰는 아주 단순한 개인의 습관이 결국 우리 국력을 키우는 힘이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 프로필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프린스턴대 경제학박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학장- 서울대 총장- 국무총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서울대 명예교수(현)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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