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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배종찬 "DJ로부터 배우는 야권 위기 탈출 119"

클린턴·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통점은?…난관을 뚫고 극적으로 정권 교체 성공
DJ가 보여준 세 가지 위기 극복 해법…온 힘 다해 '책임-통합-혁신' 과제 수행
새정치연합은 '지도부 책임-담대한 양보 통한 통합-혁신적 경쟁력 확보'로 가야
  •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
[데일리한국=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 칼럼]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를 탄생시킨 주역은 한두 사람이 아니다. 램 이마뉴엘 현 시카고 시장도 있고, 아직 백악관에 몸담고 있는 최고의 책사 데이비드 엑설로드도 있다. 이들이 주로 참모로서 대통령 탄생에 기여했다면 대중적 인지도를 가지고 오바마 당선에 기여한 인물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다.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는 아내인 힐러리를 지원하느라 오바마는 경계의 대상이었지만 본선에선 달랐다. 전쟁 영웅인 공화당 존 매케인 후보를 이기는 것은 생각보다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전직 대통령이자 미국 전역에 폭넓은 선거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특히 남부 흑인들과 히스패닉들로부터 절대적인 호감을 받고 있는 그였다. 1992년 미국 대선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그의 임기를 거쳐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중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내년에 치러질 미국 대통령선거에서도 부인 힐러리의 가장 중요한 정치참모로 그의 존재가치는 빛나고 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가치는 1992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6년 대통령에 당선된 민주당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재임 시절 외교 문제와 관련한 미숙한 판단과 국내 경제 침체로 재선에 실패했다. 아무리 퇴임 후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카터 전 대통령의 낮은 국정수행 지지율은 두고두고 민주당 정권 재창출에 걸림돌이 되었다. 공화당 브라더스인 레이건 전 대통령과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의 12년 장기 집권을 거치고서야 겨우 아칸소 주지사 출신의 중앙정치 풋내기인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기회가 왔다. 그는 국민들의 눈높이를 제대로 감 잡은 ‘New Democrat'(새민주)전략으로 대권을 거머쥐었다. 민주당 지지층으로서는 잊을 수도 없고 결코 잊어서도 안 되는 순간이었다. 알고 보면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가 거의 당선에 가까울 수 있었던 것도, 오바마가 맥케인과 접전 끝에 당선될 수 있었던 동력도 클린턴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2년 이후 미국의 민주당 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보적인 인물이 클린턴 전 대통령이다.

클린턴·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통점…난관 뚫고 정권 교체 성공

클린턴 전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민주당 지지층의 결집이었다. 그리고 중도층으로의 외연 확대였다. 클린턴은 12년 간 민주당을 외면해왔던 대중들을 향해 진심어린 자기 반성문을 작성했다. 바로 ‘New Democrat'(새민주) 보고서(Report)였다. 민주당이 그동안 정책적으로 무엇을 놓쳤고 정치적으로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한점 남김없이 반성했다. 이 과정이 '책임'이라면 다음 과정은 '통합'이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미국 사회를 향해 ‘하나의 미국’이 될 것을 강조했다. 걸프전쟁을 치른데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수층을 극단적으로 엄호해왔던 공화당 정권에 대한 강한 적개심이 미국인들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었다. 클린턴은 흑인 사회를 껴안았고 이민법에 불안해 하는 히스패닉의 한숨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더 큰 민주당을 위해 전면적으로 중도층에게로 나아갔고, 심지어는 보수적 인사들과도 대화를 나누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국민적으로나 정치 영역으로나 ‘New Democrat’의 범위는 넓어졌다. 마지막으로 혁신이었다. 1960년대 초 민주당 출신 대통령인 케네디 이후 미국 사회가 다시 역동적인 순간이 있었을까. 부인 힐러리 클린턴을 통한 여권 신장이나 격식을 파괴하는 자유분방함마저도 혁신의 물결로 이어졌다. 부통령인 앨 고어는 '정보 하이웨이'(Information Highway)를 통해 스티브잡스. 빌게이츠 등 새로운 성장동력의 주역들을 키워내지 않았는가. 각종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지층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이다. 클린턴 시대에서 앞서가는 혁신이 없었다면 아이폰을 만들어내고,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IT시대를 선도할 기업의 탄생이 가능했을까.

이런 클린턴 전 대통령을 많이 닮은 인물이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도 가까운 사이였지만 정치적인 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아주 각별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위기에 빠졌던 미국 민주당을 클린턴 전 대통령이 구했던 것처럼 정권 교체가 힘들었던 상황을 반전시킨 이력도 대동소이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1년 대선에 나선 이후 만리역정 끝에 1997년 드디어 대권을 거머쥐었다. 만약 1992년 대선 패배 이후 성원을 보내준 유권자들에게 책임지는 모습의 ‘정계 은퇴’ 선언이 없었다면 대권 승리가 가능했을까. 1995년 한국으로 돌아와 분열되고 무기력해진 야권을 복원하고 심지어 김종필·박태준 전 총리와 연대하는 이른바 경계선마저 넘나든 ‘통합’이 없었다면 수평적 정권교체가 가능했을까. 그리고 집권 경험은 없었지만 경제 위기 상황에 대한 준비와 새로운 성장동력인 IT 산업에 대한 ‘혁신’적 이해가 없었다면 과연 유권자들로부터 ‘준비된 경제 대통령’후보로의 설득이 가능했을까.

지금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다. 과거 군사정권 하 야당은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외부로부터 수없는 위협을 당했었다. 그렇지만 끝내 이겨냈었다. 아무리 큰 고난이라 할지라도 내부가 태산의 바위보다 더 단단히 뭉친 결과였다. 지금의 내부 분열은 그래서 더 심각하고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지경이다. 위기의 해법은 선인의 지혜로부터 찾아야 한다. 김 전 대통령이 보여준 ‘책임’-‘통합’-‘혁신’의 메커니즘을 배우지 않는다면 위기탈출 119는 없다.

야권 위기 극복 위해 DJ에 배워야…우선 '선거 패배 책임론'

우선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배우는 ‘책임’이다. 정치인에게서 가장 큰 책임은 선거 결과에 대한 책임이다. 특히 대선후보처럼 당을 대표해 선거에 출마했거나 전국적인 선거인 지방선거와 국회의원선거를 진두진휘하는 대표로 역할했다면 책임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선거 패배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면 유권자들은 결코 그 정치인을 따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1987년 대선은 민주 진영의 분열로 점철되었다. 만약 양김(김영삼-김대중)이 단일화했더라면 제13대 대통령이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민주화추진협의회의 결성 취지와 국민들의 여망과는 달리 끝내 후보 단일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분열의 뒷모습은 싸늘했다. 1988년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통합은커녕 사분오열된 야권의 무력함만을 노출했다. 영·호남으로 나뉘어 지역 갈등은 심화되고 자칫 노태우정권이 끝난 후에도 정권 교체 가능성은 희박해질 수 있는 상황으로 흘러갔다. 온갖 비난 속에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을 택한 데는 당시 야권 상황만으로도 많은 설명이 가능해진다.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민주화의 동지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으로 여당 프리미엄과 함께 전국적인 조직력을 갖춘 상태였다. 더구나 ‘경제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가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까지 출사표를 던지면서 경제 분야에 대한 차별화도 힘든 환경이 되어 버렸다. 190여만표 차이의 패배였다. 그러나 내용으로 보자면 서울에서는 김영삼을 눌렀고, 인천과 경기에서 박빙이었다. 충청에서도 선전했고 호남은 압승이었다. 영남에서는 부산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에서 정주영 회장에 비해서도 열세로 나타났다(그림1). 92년 선거를 지배한 구도를 따져보면 김 전 대통령은 의미 있는 선전을 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었다. 역사에 가정이 없듯 정치에도 결과를 합리화하는 가정은 없다. 그러나 만약 김 전 대통령에게 정계 은퇴라는 고뇌의 결단이 없었다면 95년 복귀가 가능했을까 그리고 97년 대통령 당선이 가능했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도 후보자 신분이었던 2002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 난후 ‘책임’을 지고 재평가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후보 단일화’라는 통합의 메커니즘으로 넘어가지 않았는가.

'통합'도 배워야…97년 대선 승리는 'DJT' 통합의 산물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반드시 배워야 하는 그 다음의 위기 탈출 해법은 ‘통합’이다. 87년 직선제 개헌 직후 대선 패배, 그리고 3당 합당으로 달라진 92년 선거 지형에서의 참담한 패배로부터 김 전 대통령이 배운 교훈은 매우 컸다. 합당은 아니었지만 대선 승리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보수 성향이 강한 두 인물과 협력했다. 통합은 더 큰 결과를 만들기 위해 거의 필수적인 전략이다. 오죽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이후 민주당 계열의 정당 명칭에는 줄곧 통합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겠는가. 2007년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통합’민주당의 후보였다. 2012년 문재인 대표는 민주‘통합’당의 후보였다. 안철수 전 대표 세력과 합당한 신당은 새로운 당명을 얻기 전 줄곧 ‘통합신당’으로 불렸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연합’은 통합적 의미가 담겨 있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기획된 ‘DJP 연합’은 김 전 대통령의 대권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궁하면 통하게 마련이다. 대권으로 가는 첫 단추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단한 일이라면 첫 번째 관문은 96년 국회의원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김 전 대통령이 이끈 새정치국민회의는 고작 79석에 그쳤다. 거대 여당을 견제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뿐 아니라 대권 도전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래서 이강래 아태재단 상임고문을 중심으로 수립한 돌파구가 김종필 전 총리와의 전략적 연대였다. 김종필 전 총리가 이끌었던 자유민주연합(자민련) 내부의 반발도 적지 않았지만 김 전 대통령 측이 통합을 위해 제시한 제안은 한마디로 담대한 양보였다. 김 전 총리 측은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국무총리직과 '공동정부' 구성을 보장받기로 했는데, 그것도 명실상부한 실세형 총리였다. 게다가 정부의 핵심 부처인 경제 부처의 임명권을 총리가 가지게 되며 수도권 광역단체장 중 한 명을 자민련 소속으로 하는 내용이다. 특히 김 전 총리의 필생의 염원인 내각제 개헌을 16대 국회에서 추진하기로 합의하는 내용까지 포함된다. 한마디로 대통령 빼고는 거의 다 준다는 내용인 셈이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위해선 ‘통합’ 없이는 안된다는 매우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통합’의 내용과 과정은 아쉬운 점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통합의 효과는 매우 컸다. 1992년 얻었던 804만표에 무려 228만표를 더 보탰다. 열세 지역이었던 대구·경북에서는 92년 대선보다 5%포인트 더 늘어난 14%의 득표율을 올렸다. 일종의 TJ(박태준)효과였다. 충청 지역에서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보다 43만표를 더 받았다. 김 전 총리의 지역적 후광효과를 제대로 맛본 선거였다(그림2).

노무현 전 대통령도 ‘후보 단일화’라는 가장 직접적인 통합 과정을 통해 대선 승리를 거두지 않았는가. 민주당 계열에서 선거 승리의 필승 공식은 통합이다. 이 통합은 유권자들의 기대감을 높이고 중도층을 흡수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결단이었다. 2012년 대선의 박근혜-문재인-안철수 세 후보의 삼자 대결 구도에서 당초 문 후보의 지지율은 20%대 초반 정도에 그쳤다. 그렇지만 안 후보가 사퇴하면서 박근혜 후보와 치열한 양자 대결이 가능해졌다. 역대 2위에 해당되는 문 대표의 당시 득표는 안 전 대표의 사퇴와 지지 선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지율 역시 지난 대선 직후 10%대까지 곤두박질쳤다가 지난해 안 전 대표의 신당과 통합한 직후 30%대 중반까지 치솟지 않았는가. 가진 것을 죄다 내려놓는 담대한 양보가 없다면 통합은 불가능하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으로부터 가장 크게 배워할 대목이 바로 이 ‘통합’이다.

‘혁신적 경쟁력’ 필요…DJ정부의 IT산업 발전·남북관계 개선 주목

김 전 대통령이 던져주는 마지막 위기 탈출 해법은 ‘혁신’이다. 혁신 개념의 해석은 제각각이다. 용어의 뜻조차 정확히 모른 채 마구잡이로 혁신을 연호하는 경우가 많다. 혁신을 바꾸어 말하면 경쟁력이다. 더 매력적인 정치를 보여줄 수 있는 경쟁력, 더 정교하고 보다 더 효율적인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경쟁력, 정당의 운영마저도 매우 선진화된 단계까지 끌어올려놓는 경쟁력이다.

김 전 대통령의 95년 정계 복귀 이후 정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제3의 길’을 전도한 앤소니 기든스이다. 정계 은퇴 선언 이후 영국으로 향했을 때 마침 그 시기에 집권하게 되는 영국 노동당의 변신에 주목하게 된다. 진보냐 보수냐의 싸움이 아니라 더 나은 대안을 만들어내는 제3의 길에 주목하게 되었다. 진보와 보수가 공존할 수 있는 정치 문화에 대한 고민이 새정치국민회의 바구니에 담겨졌다. 김 전 대통령에게 더 이상 색깔론 공격이 무의미해진 순간이었다. 안보 강화와 국제관계에 대한 균형감 있는 시각을 통해 이념적으로 불안해 할 수 있는 유권자들을 안심시켰다. 민생의 코드를 읽는 데도 남달랐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IMF(국제통화기금) 경제 위기 상황에 대한 철저한 대응 논리는 대선 과정에서 다른 후보에 비해 더 경쟁력이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룩한 산업화에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모델로 한 ‘신경제’사고의 IT산업 발전 구상은 매력적이기까지 했다. 집권 후 IMF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성장의 반전 모멘텀을 빨리 잡을 수 있었던 데는 ‘준비된 경제 대통령’ 슬로건으로 차세대 성장동력을 고민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적어도 혁신적 사고를 하는 데 있어 김 전 대통령은 특정한 정치세력에 함몰되지 않았다. 보수적 성향의 김중권 전 의원 같은 인사가 대통령비서실장을 하고 민주당 대표를 맡는 일도 김 전 대통령 스타일에서는 낯선 상황이 아니었다.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가 분분하지만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한 업적은 과소평가되지 않는다. 각종 역대 대통령 평가 여론조사에서 남북관계를 가장 잘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이유는 바로 ‘혁신성’에 있다. 단순한 정치적 이익에 함몰되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가장 중요한 능력을 발휘하는 데 있다. 특정 계파의 수장에 불과하다면 또는 개인의 정치적 이익만을 노렸다면 아태재단을 수립하고 남북관계와 동아시아 발전을 위한 정치 거인의 대장정이 가능했을까.

중앙일보가 2010년 1월 20~31일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한 역대 대통령 리더십에서 김 전 대통령은 21명의 선택을 받아 53명으로부터 선택받은 박정희 전 대통령 다음이었다. 특히 평가 항목 중 위기 대응 능력, 외교, 대중 설득력에 있어서는 박 전 대통령을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남북관계 개선 능력으로 김 전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전문가 조사와 별도로 실시된 조사(2010년 1월14~15일 전국1007명 전화조사 표본오차95%신뢰수준±3.1%P)에서도 김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 다음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이 53.5%로 가장 높았고 김 전 대통령이 24.4%, 노무현 전 대통령이 16%였다. 이념 성향상 박 전 대통령이 가장 앞서지만 평가 항목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김 전 대통령의 ‘혁신적’ 경쟁력이 결코 가볍게 평가받지 않는다. 일반인 대상 평가 항목에서 위기 대응 능력, 외교, 대중 설득력, 의회 관계에서는 가장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으로서,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서 이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혁신 아니겠는가. 월남 이상재 선생과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씀처럼 기회를 잡기 위해선 실력을 쌓아야 하고, 혁신을 위한 경쟁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회창 전 총재는 대선을 삼수했지만 끝내 대통령 신분으로 청와대 정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97년 대선 패배 이후 책임(Responsibility) - 통합(Consolidation) - 혁신(Revolution)으로 나아가지 못한 탓이 크다. 국민의 사랑, 유권자들의 지지는 공짜로 받을수 있는 전리품이 절대 아니다.

새정치연합 해법은?…'지도부 책임-대통합-혁신 경쟁력'으로 가야

총선을 불과 몇 개월 앞두고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내홍이 깊어지고 있다. 덩달아 지지층들의 고민 또한 넓어지고 있다. 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정권을 가져오는 데 10년이 걸렸던 정당이다. 지금의 위기 상태라면 다시 되찾아오는 데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김 전 대통령은 4수 끝에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김 전 대통령의 재도전을 비꼬거나 폄하하지 않는다. 97년 네 번째 도전할 때 김 전 대통령의 리더십 완성도는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아플수록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패배를 통해 책임을 보여주고 통합을 통해 혁신의 가능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준비된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IMF 국가부도 사태를 극복해 낼 수 있었고 백척간두의 남북 대치 상황 속에서도 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가장 큰 유산이라면 단언컨대 김 전 대통령이다. DJ의 집권이 없었다면 노무현 대통령의 탄생이 가능했을까. 노 전 대통령의 탄생이 없었더라면 문재인 대표의 존재는 가능했을까. 김 전 대통령이 남겨 놓은 위기 탈출 해법에 눈감는다면 더 이상의 돌파구는 없다. 먼저 지도부의 책임지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정권 창출을 통해 대한민국을 바꾸는 데 동의하는 세력이라면 담대한 양보를 통해 통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 정부를 제대로 견제할 수 있고 여당보다 우위에 서는 ‘혁신적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더 이상 선언적인 비전 제시와 무능력한 혁신성이 환영받을 자리는 없다.

20년 전인 1995년의 상황과 2015년의 상황이 도플갱어처럼 닮아 있다. 그때는 ‘백마타고 온 기사’처럼 김대중이라는 불세출의 지도자가 있었지만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에 그런 지도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변화하지 않으면 변화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끝은 아름답지 못하다. 김 전 대통령이 가장 강조한 대상은 국민이다. ‘국민은 언제나 현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민심은 마지막에 가장 현명하다. 국민이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니나. 그러나 마지막 승리자는 국민이다.’(김대중)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위기 탈출 119는 김 전 대통령의 삶에서 그 해답을 오롯이 찾을 수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 프로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서울대 국제대학원, 고려대 행정학과 박사과정 수료- 한국교육개발원 전문연구원-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책임연구원- 한길리서치 팀장-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이사,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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