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기본법’ 에 부합한 개헌돼야…개헌보다 헌법 운용이 중요

권력구조 개편에 치우쳐선 안 돼…개헌이 정치 개편 도구 되면 끝장

정치개혁 함께 논의해야… 시대정신에 부합한 총체적 개헌 돼야

어떤 방식의 개헌도 쉽지 않아…개헌 앞서 정치, 국정운영 정상화 필요

제20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개헌이 정치권의 화두로 급부상하고 있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불을 댕겼다. 정 의장은 20대 국회 개원사에서 “개헌은 결코 가볍게 꺼낼 사안은 아닙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외면하고 있을 문제도 아닙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국회의장으로서 20대 국회가 변화된 시대,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헌정사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주춧돌을 놓겠다”고 했다.

개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듯, 정 의장은 대표적 개헌론자인 우윤근 전 의원을 국회 사무총장으로 내정했다. 우 내정자는 19대 국회 때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과 함께 ‘개헌 추진 국회의원 모임’을 주도했고, 원내대표 시절에는 국회내 개헌 특위 설치를 주장했었다.

대한민국 대선은 개헌 논의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대선 때가 되면 각종 개헌 논의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지난 1997년 대통령 선거 때는 ‘내각제 개헌’이 공약으로 제시되었고,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여야 후보 모두가 ‘임기 안에 국민의 뜻을 모아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공약했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집권 후 4년 중임제와 국민의 생존권적 기본권 강화 등을 포함한 여러 과제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해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개헌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했다. 문재인 후보도 “대통령 4년 중임제에 대해 이미 국민 공론이 모아졌고 부통령제도 도입할 수 있다”며 “이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워서 개헌만큼은 집권 초에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무성했던 개헌 논의는 새 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소리 없이 사리지고 차기 대선이 가까이 오면 개헌론이 또다시 수면 위로 부상한다.

개헌이 필요한 이유…박 대통령 ‘걸림돌’

정치권에서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할 때 제기되는 몇 가지 논리가 있다. 첫째, 대통령 한 사람에게 권력이 너무 과도하게 집중돼 있어 극단적 정치 대립을 낳는다. 대통령에게 권력이 너무 많이 몰려 있어 행정이 정치를 무시하고, 권력을 잡기 위한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상쟁의 정치가 판을 친다는 것이다. 대안으로 대통령제와 내각제를 절충한 ‘분권형 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가 거론된다. 직선제 대통령이 외교, 안보, 국방 등의 업무를 맡고 다수당 대표가 총리를 맡아 내치를 담당하는 모델이다. 이른바 오스트리아나 프랑스 등이 예다.

둘째, 5년 단임제로는 책임 정치를 구현할 수 없다. 5년 단임제에서는 대통령의 국정수행이 다음 선거를 통해 평가받지 못하고, 또한 국가적 전략과제나 미래과제들이 일관성과 연속성을 갖고 추진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든다. 대안으로 대통령의 임기를 5년에서 4년으로 줄이고 중임을 가능하도록 하는 ‘4년 중임 대통령제’가 거론된다. 미국이 대표적인 예다.

셋째,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가 맞아야 국정 운영이 안정화된다.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말인 2007년 1월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일치시켜 만성적인 정쟁에서 벗어나자면서 ‘원 포인트 개헌’을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과거에도 대선을 앞두고 수차례 정치권에서 개헌론이 부상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적 환경이 그 어느 때보다 개헌을 현실화하기에 우호적이다. 여야 정당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은 강력한 대권 후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대선에선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들이 겉으로는 개헌의 필요성에 동의하지만 집권 후에 강력한 통치를 위해 개헌 논의에 미온적이었다. 그런데 현재는 여권의 대권 후보가 가시화되지 않고 야권이 분열돼 특정 정당이나 후보의 대선 승리 가능성이 혼돈돼 있어 역설적으로 개헌의 적기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런데 현 시점에서 개헌 논의를 가로막는 최대 걸림돌은 현재 권력인 박근혜 대통령이다.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가 제기될 때마다 박 대통령은 ‘개헌은 블랙홀’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적극 반대했다. 집권 4년차인 올해 개헌이 본격화되면 구조 조정, 규제 개혁 등 경제를 살리기 위한 핵심 의제는 실종되고,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레임덕이 가속화 될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박 대통령은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말에 원 포인트 개헌을 제기했을 때 “참 나쁜 대통령이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스스로 ‘나쁜 대통령’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현 대통령 임기내 개헌이 성사되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바람직한 개헌의 조건들

분명 개헌은 우리 사회가 처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가 될 수는 없다. 더구나, 무서운 대통령 한마디에 집권당 원내 대표의 목이 날아가고, 국회에선 소수독재가 정당화되는 국회선진화법이 여전히 작동되고, 전문성이 요구되는 상임위원장직을 편법으로 1년씩 쪼개서 맡는 편법이 판을 치고, 진영의 논리에 빠진 여야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는 데 개헌을 한다고 무엇이 바뀌겠는가.

그렇다고 개헌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개헌 논의가 생산적이고 국민의 공감을 끌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권력구조 개편에만 치중하면서 정치 공학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헌법은 ‘국가의 기본 법칙으로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 국가의 정치 조직 구성과 정치 작용 원칙을 정하는 최고의 규범’이다. 헌법은 역사와 정신이 녹아 있는 문서다. 따라서, 헌법은 정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활용하는 정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개헌이 권력을 나누기 위한 정치 개편의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 개헌의 순수성은 사라지고 정쟁만이 판을 치게 된다. 현재 여권은 유력 대선후보가 아직 가시화되지 않고 야권 후보들에게 크게 밀리고 있다. 따라서, 여권에서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반기문 총장 영입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현재 권력이 미래 권력을 만들고 퇴임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추진할 것이라는 말도 들리고 있다. ‘반기문 대통령 친박 총리’ 시나리오다. 야권은 더 민주와 국민의 당으로 분열돼 있지만 정권을 찾아오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든 연대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3자 필패론’이 그 배경이다. 따라서, 지난 1997년 대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의 DJ와 자민련의 JP가 내각제를 매개로 DJP 연대를 성사시켜 정권을 교체한 것 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문제는 누가 양보할 것인가이다. 지난 2012년 대선에서 안철수 대표는 문재인 후보에게 양보했다. 이번에 또 다시 양보하기란 쉽지 않다. 국민의당이 호남의 적통성을 갖고 있고, 정당 득표 2위를 차지할 만큼 안 대표가 문 전대표보다 표의 확정성이 크다는 이유로 더 민주의 양보를 요구할 것이다. 더 민주는 원내 제1당이 어떻게 38석의 원내 제3당에게 양보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반기문 총장의 바람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3자 필패론이 제기될 것이고 두 야당이 개헌을 매개로 연대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 이원집정부제가 매력적인 대안으로 떠오를 것이다. 여하튼 여야의 내부적 이해 관계 때문에 향후 개헌 논의는 ‘4년 중임제’보다 ‘이원 집정부제’가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이런 식의 권력 나눠 먹기 식 개헌 논의는 결국 87년 체제를 극복할 수 없다.

둘째, 개헌 못지않게 뒤틀리고 왜곡된 정치 과정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정치 개혁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 특히, 국회와 정당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 대통령은 삼권분립 원칙을 지키면서 국회와 야당을 존중하고, 국정 운영을 청와대에서 내각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정당은 의원들이 소신과 양심에 따라 의정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강제적 당론을 폐지하고, 만악(萬惡)의 근원인 공천 제도를 혁신해 계파 정치를 종식시켜야 한다. 국회는 갈등지향적 운영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무엇보다 특정 정당의 동의가 없으면 어떤 법안도 통과하기 어려운 소수 독재의 전형인 국회선진화법을 우선적으로 개정해야 한다.

셋째,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총체적인 개헌이 되어야 한다. 시대정신을 반영하려면 권력구조 개편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개혁이 필요하다. 권력구조 개편을 넘어서 기본권과 지방 분권, 선거구제 개편 등으로까지 논의가 확대돼야 한다. 87년 체제이후 약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시대는 바뀌었고 생명 존중, 환경 존중 등 국민의 기본권에도 변화가 생겼다. 특히, 평등권에 대한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양성평등이란 성별에 의해 차별받지 않고 누구나 보편적 인간으로 권리를 갖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여성들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차별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또는 남녀가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사회구성원으로 모든 영역에 평등하게 참여하고 동등하게 대접받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2000년에 남녀 동수법을 위해 헌법을 개정하기도 했다. 헌법에 “의원 선거와 선출직에 남녀의 평등한 진출”을 규정했다. 분권과 평등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게 선거 제도도 변화되어야 한다. 승자 독식과 지역패권 정당 체제의 원흉인 소선거구제의 폐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선거제도 개편을 논의해야 한다.

넷째, 개헌 논의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진행돼야 한다. 종결 시점, 내용과 결론을 미리 정해 놓고 시한부로 추진하면 결국 개헌 논의는 정치 공학으로 빠지게 된다. 우윤근 내정자는 15일 ‘개헌특위와 의장 직속 자문기구의 개헌 계획 논의 → 연말 대국민 대상 공개적 논의 → 연초 또는 4월 재보궐 선거 때 국민투표’라는 시간표를 제시했다. 행정자치부 장관 출신인 친박의 정종섭 의원도 “올 연말까지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원 포인트 개헌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했다.

개헌 쉽지 않아…헌법 아닌 운영이 문제

정치권에서는 대선 주자들이 대선 공약으로 개헌을 걸게 하고, 차기 정부에서 개헌을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문제는 어떤 방식의 개헌을 채택하든 차기 정부가 개정 헌법을 적용할 경우 새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가령 개헌을 통해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하면 새로 원(院) 구성을 해서 총리를 뽑아야 한다. 현재의 국회는 해산이 불가피하다. 또한 4년 중임제를 도입해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선출 주기를 맞추려면 새 대통령의 임기를 줄이거나, 20대 국회의원이 임기를 절반 정도 줄여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이런 이유들 때문에 개헌 논의는 앞으로 뜨겁게 달궈질 가능성이 크지만 동상이몽이 되고, 동시에 일장춘몽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개헌과 관련해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정치에서 국정 혼란과 정치 실패는 헌법 때문이 아니라 운영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분권형 대통령제가 채택되면 권력이 분산돼 그동안 존재하지 않던 협치가 생겨날 것이라는 주장은 순진한 생각이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과 국회가 뽑은 총리가 수시로 충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헌에 앞서 뒤틀리고 왜곡된 기존의 국회와 정당 운영 구조를 바꾸고, 수직적 당ㆍ청 관계를 바꾸는 것이 정치와 국정운영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실효성 있는 해법이 될 수 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 프로필

아이오와대 정치학 박사

한국선거학회 회장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치개혁위원회 위원

한국정치학회 이사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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